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선 Oct 20. 2017

D-11. 상실의 슬픔에 대하여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1.

누구나 죽는다.

이는 확실한 게 별로 없는 이 세상에서 확실한 몇 안되는 명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저 경험하면서 배워나갈 뿐이다.


2.

아직까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진지하게 겪어본 적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한 살 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오랜 기간 아프셨고,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음에도 별로 친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많이 울었지만,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머니께서 대학생 때 돌아가셨다.

엄마가 많이 슬퍼하시는 걸 보는 게 더 슬펐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동창이 대학생 때 죽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인연이 있는 친구였다.

장례식장에는 나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이 많았다.


옛 직장 동료가 올해 여름에 암으로 죽었다.

그녀가 암에 걸린 후 그녀와 나의 거리가 허락하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연락했다.

참 맑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시큰하다.


3.

<슬픔의 위안>에서 말하는 슬픔은 sadness가 아니라 grief이다.

슬픔 중에서도 무거운, 죽음과 상실에 대한 슬픔이다.

다루는 주제만큼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도 무거워진다.

처음에 서점에서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없이 어둡기만 한 책은 아니다.

유머와 위트가 가득 담겨 있다.


4.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와 정보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다.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당신이 느끼는 것을 느낀다. 당신의 감정이 삐딱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추하거나 전혀 당신답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당신이 덜 외롭다고 느끼게 하는 것,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바보 같다는 느낌을 덜 받게 하는 것이다. - 18페이지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도널드 홀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 제인과 내게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 중에서 최고의 해는 언제였나요?'하고 물었다면 우리의 대답은 똑같이 가장 기억이 안 나는 해였을 것이다." 도널드 홀과 제인 케년은 평온하게 일을 몰두하는 날, 즉 C.S.루이스가 말한 "가슴이 미어지도록 평범한 일"들로 가득 찬, 그렇게 잊기 쉬운 시간들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 36페이지

사소함은 참 무섭다. 켜켜이 쌓였을 때의 위력이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타격을 줄 수 있는 상실은 남자친구와 엄마이다. 두 사람과는 사소한 일을 너무 많이 같이 했다. 무수히 많은 밥을 같이 먹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 평범함이 참 그리울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을지 모르는 공감 능력을 얻는다. 공감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시대가 약화시키고 있는 한 가지 본능을 회복시킨다. - 76페이지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자들만이 타인의 슬픔, 외로움, 괴로움에 공감해줄 수 있다. 내가 찾은 우울증의 확실한 가치는 타인의 우울증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슬픔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야기를 걸어올 것이다. 말로든, 가슴 속 속삭임으로든. 그런데 당신의 아픔은 가슴속 속삼임만으로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정직한 말은 일종의 치료약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가 말했듯이 "말은 병든 마음을 고치는 의사다." 슬픔만이 아니다. 정서적 건강을 되찾는 중요한 방법들은 모두 정직한 말하기와 관련이 있다. - 87페이지

요즘 상담을 업으로 하다 보니, 이런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다. 정직하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슬퍼하는 과정도 병과 죽음처럼 수치스럽게 여긴다. 실패라고 여기는 것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도 여긴다. 사람들은 슬퍼하는 사람을 두고 "8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이겨내지를 못하는군"이라고 한다. 슬퍼하는 이들 스스로도 똑같은 말을 한다. 만약 사고로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진 사람이 있다면, 겨우 몇 달 안에 그가 라켓볼의 명수처럼 코트로 복귀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108페이지
그러나 슬픔에 잠기면 머리는 평소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가장 근원적인 논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항상 곁에 있던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버렸다. 뇌는 이 상실을 계산할 수 없고, 따라서 일시적인 정신착란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빠진 이들은 상실을 겪고 처음 느끼는 슬픔을 좀처럼 슬프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초현실적인, 악몽 같은, 충격을 받은 느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 130페이지

슬퍼할 여유를 가지는 것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사회적 관용에 달려있기도 하다. 슬픔으로 가득차면 평소보다 업무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동료가 슬픔 때문에 오랜 기간 업무를 예전만큼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라면 얼마나 참아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우리는 비탄에 빠져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 표현을 떠올리게 되었다. (...) 의미는 단순하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입증할 수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 111페이지

이 밧줄 표현 방식은 정말 모두가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시를 들면 굉장히 명쾌한데, 예를 들면 "그녀는 더 좋은 곳으로 갔어요"나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에요"같은 표현은 붙잡을 수 없는 밧줄을 던지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책임질 수 없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경우다. 반대로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나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게요.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 같은 말이 한쪽 끝을 잡고 밧줄을 던지는 경우다.

이런 위로의 표현은 꼭 상실을 경험한 사람뿐 아니라, 힘겨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라도 응용할 수 있다. 밧줄의 한쪽 끝을 잡는 것은 나도 너의 슬픔을, 힘겨움을, 외로움을 공유하겠다는 적극적인 신호다. 내가 그의 상황이라면 어떨지, 아니면 지금 그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말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신뢰를 얻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상황이 속상할 수 있다. 그래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려 들 것이다. 누군가 이들을 가리켜 카타르시스 스토커라고 했는데, 언제나 당신이 자신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자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 앞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자신을 신뢰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 115페이지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리도 만무하다. 이런 카타르시스 스토커 같은 상담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잠깐 들러서 케이크를 주고 가는 친절한 사람의 자상함도 받는 이의 감정을 고갈시킨다. 당신은 그녀의 친절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은 소진된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무척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은 소진된다. 아무리 힘든 상태여도 잠깐 한담을 나눠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은 소진된다. 손님이 떠나고 난 뒤 부엌에 들어오면, 앞어 또 다른 친절한 세 사람이 가져다준 케이크 때문에 빵 바자회라도 여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스스로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생각이 또 마음을 갉아먹는다. - 165페이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은 소모된다. 큰 일을 치르는 사람은, 때로는 그냥 놔두는 것이 제일 도와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다시 유머를 즐기게 되리라는 것, 삶은 계속되리라는 것, 시계는 다시 똑딱똑딱 가고, 별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숨 막히게 하는 슬픔의 미덕과 대결을 벌이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 157페이지

이걸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참 건강한 멘탈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한다. 별로 그럴 자신은 없지만, 희망해본다.


5.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 때가, 근 시간 내에 오지 않길 바란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면서 살고 싶다.


*이 책의 모든 인용구는 <슬픔의 위안>(존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현암사)에서 인용했습니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D-12. 남의 인생을 파괴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