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선 Nov 25. 2017

아날로그적인 SF 이야기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반전이 있는 게 아니라 큰 상관은 없습니다) 


1.

아날로그와 SF, 거의 대척점에 가까운 두 단어의 느낌을 모두 담아낸 이야기를 읽었다. 

인공지능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결국은 사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이기도 한 '한 스푼의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지구의 기나긴 역사에서 (아직은) 100년 정도밖에 못 사는 인간의 삶이란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정도의 시간만큼 찰나라는 것이다. 


2.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에게 어느 날 묵직한 택배가 하나 배송된다. 

택배 안의 물건은 17세 소년형으로 만들어진 인간형 로봇이다. 얼마 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아들이 다니던 회사에서 샘플로 제작했던 것을 받은 것이다. 

로봇은 '은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명정의 아들이자 세탁소 점원으로 살아간다. 


3. 

현재 시판된 로봇에 비유하자면 은결의 외형은 페퍼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사람처럼 이족보행을 하고, 집을 돌아다니며 세탁물을 수거하거나 배달할 수 있고, 다림질도 가능하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 및 학습 능력도 무척 뛰어나며,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 인간한테서나 볼 수 있는 가벼운 충동이나 변덕 비슷한 현상"을 수행하기도 한다.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밤거리로의 목적 없는 불규칙한 산책과 방황, 선물을 받고 난 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 마치 관심을 갖거나 특별히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텔레비전 프로그램, 어린 소녀에서 처녀애로 자라난 이웃집 여성에 대한 연심 
- 221페이지 


심지어 마지막에는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훌륭한 로봇이라면, 실로 대단한 로봇이다. 


4. 

소설은 은결을 중심으로, 그의 주인인 명정, 동네에서 은결이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지켜보며 관계를 맺게 되는 준교와 시호, 그리고 처음 명정이 은결을 조작하는 것을 도와준 세주의 이야기가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간다. 

주요 인물인 4명 모두 삶이 주는 진한 피곤함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주어진 자리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은결은 알아간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과 사람이 무너지는 것의 차이를.

'한다'와 '하고 싶다', '하지 않는다'와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의 차이를. 


5.

이 책의 주요 배경은 세탁소이며, 세탁은 은결이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원리로 기능한다. 이에 맞춰 세탁과 관련한 수려한 비유문들이 많이 나온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 29페이지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51페이지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 157페이지


6.

아무런 감정 없이 사용자의 기쁜 일 슬픈 일을 모두 받아주는 휴지통 같은 로봇을 정물화 속 사과 모양으로 집에 두고 살아가는 일상을 문득 상상해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나 분쇄된 자존심, 방향감각을 상실한 울분 같은 것들을 던져 넣을 수 있는 휴지통. 거기에 쓰레기를 먹고 나면 사용자의 귀에 달콤한 말을 토해내기까지. 너는 괜찮아, 잘했어, 다음엔 잘될 거야 등등. 로봇은 무한한 이해와 관용을 흉내 내고 사람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을 소비함으로써 스트레스 없이 나날이 개운한 일상. 코드가 맞지 않는 동거인보다 유용하고 뒤끝 없는.
- 170페이지


얼마 전 썼던 <AI는 심리 상담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궁극의 심리 상담 로봇은 무한한 이해와 관용을 흉내 내는 로봇일까, 아니면 때로는 화도 내고 따끔한 일침도 놓는 로봇일까. 


7.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 249페이지


분노. 사랑. 절망. 열망. 기원. 

한 스푼의 시간 동안 해야 할 모든 것. 


*이 글의 모든 인용구는 <한 스푼의 시간>(구병모, 예담)에서 인용했습니다. 


<끝> 



<광고>

2017년 12월 1일에 수원 매탄동에 심리상담서점 '리지블루스'를 엽니다. 

브런치에도 곧 자세한 소개글을 쓰겠지만, 빠른 소식은 인스타그램(@bookstore_lizzyblues)에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잃을까봐 두려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