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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분명한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술

손보미의 '사랑의 꿈'

by myungworry

작가 손보미는 초등학교 때 불조심에 관한 글을 써서 학교 대표로 상을 받았다. 부상은 소화기였다. 담임은 “다른 아이의 글을 보냈더라도 그 정도 상은 받았을 것”이라며 소화기를 학교에 기증하라고 권했다. 손보미는 “내게 주어진 것이 다른 누군가의 변덕스러운 선택에 의해 가능했다는 낭패감과 그러므로 내가 받은 무언가를 마땅히 내줘야 한다는 세상의 비정한 이치”를 느꼈다고 한다.



<사랑의 꿈>은 근 몇 년 사이 국내 굵직한 문학상을 잇달아 가져간 손보미가 5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이다. 위에서 언급한 ‘낭패감’과 ‘비정함’에 기반해 쓰여진 6편의 단편들은 모두 10대 여자아이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10대 여자아이의 감정을 느낀 적 없는 중년 남성 독자에게도 이 책은 격렬하고 세심하면서 미묘한 정서의 모험을 제공한다.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불장난’은 몇 달 전 이혼한 ‘나’가 유년 시절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초등학생인 주인공은 아버지의 이혼과 재혼, 어머니의 해외 이주, 새어머니와의 동거라는 큰 사건들을 통과한다. 아이는 평소 친하던 친구 무리와 멀어지고, ‘중학생 오빠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는 양우정 무리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아이의 행동은 부모나 교사에겐 가정사 혹은 사춘기로 인한 방황 정도로 간략히 요약되겠지만, 아이는 이 시절에 “터무니없이 치명적이고 통렬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세계의 비밀을 들춘다. 다양한 시점에서 여러 사건들이 전개된다. 파편화된 기억을 그러모은 듯하면서도, 그 이음새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평론가 강지희는 “한국 문학사가 보여준 성장의 순간들을 다시 썼다”며 “우리 시대 가장 섬세하게 세공된 단편 미학의 경이로운 성취”라고 상찬했다.


위와 같이 손보미의 소설집 <사랑의 꿈>에 대해 썼지만, 한 군데가 틀렸다. "단편들은 모두 10대 여자아이의 시선에서 전개된다"는 부분이다. 표제작인 '사랑의 꿈'은 10대 소녀가 아닌, 성인 여성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난 이 소설집에서 '불장난'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사랑의 꿈'이 가장 와닿지 않았다. 화자의 연령대가 다른 작품들과 달라서인지 이 작품집에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종반부 고양이 로드킬 같은 대목이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작은 불평일 뿐이다. '불장난' '밤이 지나면' 등 몇 편은 탁월했다. 세상의 비밀을 알아차린 듯 여기지만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정말 세상의 비밀을 알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소녀들의 마음을 그려냈다. 불분명한 것은 불분명하게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불분명한 묘사들이 매우 분명했다. 성별이 다른 나도 10대 언젠가 느꼈을지 모르지만 금세 덮어두고 지나간 감정들, 이제 와선 마음의 가장 아래층에 깔려있어 절대로 들출 수 없는 감정들을 햇빛 아래 드러내고 보여준다. 왜 이 작가가 근래 수많은 문학상을 가져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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