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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23. 2019

제설, 제설

만능 28호

본능적으로 -윤종신, Youtube





철인 28호 만화, 구글


흔히 '철인'이라고 하면 강인한 이미지, 못하는 것이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스포츠 철인경기를 보면 그들은 철인이라는 호칭을 따기 위해서 바다수영, 마라톤, 자전거 등 일반인이었다면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것들 여러 가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척척해낸다. 또 내가 어릴 적 엄청난 히트를 쳤던 만화 '철인 28호'의 이름에도 철인이 들어간다. 우리의 어눌한 철인 28호는 오늘도 첨단 무기의 블랙옥스를 무찌르고 있다. 철인이라는 이미지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렇게 강인하고 함께 있으면 듬직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한 영상에 의해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포털사이트들이 점령당하다시피 했던 사건이 있었다. <레밀리테라블>이라는 영상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패러디하여 공군 군악대가 제작한 것으로 영상 안에서 그들은 수준급 외모와 노래실력을 뽐내며 진지하게 제설을 하고 있었다. 군인이라면 한 번쯤 해보았던 그 제설. 어쩌면 나는 그 제설을 군입대 전에 이미 수준급으로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윈터스쿨 수학 조교는 10명이 훌쩍 넘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2명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건장한 21, 22살의 남자들이다. 우리의 주 임무야 늘 하던 수학에 관련된 일이었지만, 자주 학생실장 혹은 경리실 직원들로부터 호출을 받고 학원 내의 여러 일들을 해결하는데 차출됐다. 3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주어진 임무 이외의 일이기 때문에 부당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 같이 하게 되니 억울하지도 않고, 여러모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겼다.


거의 눈을 볼 수 없던 남부지방에서 경기도 광주시로 올라오니 눈을 시도 때도 없이 보았다. 유독 산골짜기에 눈이 많이 오는 곳인데 한창인 1-2월에 근무를 했으니 정말 눈을 지겹게 보았다. 매달 정기적금을 꼬박꼬박 납입하듯이 하늘은 그렇게 눈을 매일 퍼붓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전 날밤 각종 TV쇼를 보며, 푸짐한 야식을 먹고, 학생들에게 못 다 해준 밀린 질문들을 해결하다 숙소에서 곤히 자고 있던 날이었다. 경적을 깨듯 경리실 안 선생님께서 급하게 조교들을 깨우셨다. 학생들이 아침을 먹으러 가는 매우 이른 아침이다.


눈이 펑펑 오는 2010년 초, 눈을 맞으며 놀고 있는 우리반 아이들



"얘들아, 얼른 옷만 대충 걸치고 이리 다 나와봐. 서둘러!"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급하게 다그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우리는 몸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대충 남아서 주워온 학원 체육복 위에 떡진 머리를 가릴 털모자를 걸치고 1층 로비로 나갔다. 우리 숙소뿐만 아니라 모든 수학 조교들이 비슷한 몰골을 하고 하품을 하며 서 있었다. 안 선생님은 고무장갑에 빨간 바가지 몇 개를 끌고 나오셨다. 그리고는 대항해를 떠나는 선장과 같이 "자~! 출발!" 한 마디를 외치신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끌려나갔다. 도살장 가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겨울 아침 공기는 매우 상쾌했다. 코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잠을 달아나게 해 준다. 눈 앞에 펼쳐진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세상. 장관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무렵 역시나 안 선생님은 경적을 울리듯 우리에게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자, 얘들아, 여기 빗자루랑 바께쓰(*바가지) 하나씩 알아서 잡아. 그리고 뒤로 날 따라와."


점점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왔다. 눈치 빠르게 아이들은 일이 쉬울 것 같은 도구들을 쟁탈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목장갑 하나를 사수하고는 아무것도 잡지 못해 맨몸으로 선생님을 따라갔다. 어떤 사람은 빗자루를, 어떤 사람은 큰 쓰레받기를 집은 채 따라왔다. 선생님을 따라 학원을 반 바퀴 돌았다. 그곳에는 경리실장이신 김 선생님께서 몇몇 직원들과 함께 큰 포대를 연신 꺼내고 계셨다. 그래. 이제야 감이 온다. 우리가 해야 할 미션이! 제설 작업이었다.


안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미션을 발표하셨다. 10명 정도의 청년들이 모여있으니 사뭇 듬직하신가 보다. 비장한 표정을 하시고는 2-3명씩 묶어서 지시를 내리셨다. 다른 선생님들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산 정상인 학원에서 산아래 입구까지 정확히 900m를 제설을 하며 내려가는 것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서울에서 오는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는 비상상황인 것이다. 출근을 못하면 아이들은 수업을 들을 수 없고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염화칼슘 포대를 수레에 싣고, 찢고, 뜯고, 비벼서 각 조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다. 배급을 받은 우리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작업의 요령은 간단하다. 먼저, 바닥에 있는 눈들을 큰 빗자루나 제설용 도구(*밀대에 쓰레받기가 달린 것 같은)를 이용해 퍼 낼 수 있는 만큼 길 옆으로 퍼낸다. 그리고 바닥에 눌러붙어있는 눈들을 깔끔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삽으로 깨서 긁어낸다. 그래도 남아 있는 눈들을 위해 마지막엔 곡식의 씨앗을 흩뿌리듯이 여러 명이 한 줄로 걸어가며 부드럽게 염화칼슘을 뿌린다. 


작업을 한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겨우 학원 앞을 마무리하고 이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역시나 염화칼슘 보급은 끊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염화칼슘 뿌리는 요령이 없어서 한 움큼 져서 한 움큼 그냥 바닥에 떨구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척하면 척인 듯이 모두가 손목 스냅과 약간의 허리 돌림을 이용해서 최저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었다.


제설을 마치고 학원에 다시 올라왔다



삽질과 염화칼슘 뿌리기의 연속이었다. 고된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사들이 도착하고도 계속되었다. 그 추운 겨울날 땀을 뻘뻘 흘리며 제설작업을 했던 우리. 학원 밑에는 큰 전원주택 마을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게도 봉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산의 초입까지 기어코 눈을 제거하며 내려갔다. 생겨야 할 요령이 많이 생겼다. 필요 없는 곳은 최대한 뿌리지 않고 바퀴가 지나갈 만한 곳만 뿌리기도 하고, 손발이 착착 맞아떨어져 훨씬 작업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작업이 끝났을까. 트럭을 타며 염화칼슘을 보급하던 경리실장님이 모두를 부르신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따뜻한 컵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3-4시간 동안 어찌나 많은 염화칼슘을 던졌는지 창고에 저장된 것들은 거의 동이 났고, 우리들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신발과 옷에 염화칼슘이 튀어서 삭고 있었고, 얼굴과 안경 그리고 머리에는 눈 꽃들이 활짝 펴있었다.  


1km 구간을 따라 내려가며 엄청난 양의 눈을 쓸고 녹였는데, 올라가면서 보니 하늘에서 눈이 다시 내렸다. 하얀 눈이 다소곳이 길가에 누워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그저 웃지요. 요호호.


이렇게 우리의 첫 제설이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을 뿐이다. 5주 동안 우리는 눈이 정말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느낄 때까지 치우고 또 치웠다. 그렇게 제설의 달인이 되고 갔다. 나중에는 안 선생님께서 본인도 우스웠는지 '피식' 미소를 날리시며 말씀하셨다.


"얘들아, 시간 됐다 모여라. 출동하자~!"


"네..."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일인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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