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less》갤러리현대(~21.3.28)

전시 이야기

《 Timeless 》 갤러리현대(2021.2.19 - 3.28)



내일이면 3월이네요.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모르고 지냈어요.

작업 중인 원고가 좀처럼 끝나지 않아 내내 붙잡고 있다가, 너무 오랫동안 포스팅을 안 하기도 했고

마침 소개해드리고 싶은 전시도 있어, 오늘은 좀 여유를 부려봅니다.



날이 참 포근해졌어요. 봄이 오긴 왔나 봐요.

곧 여기저기 봄꽃 소식이 들릴 것 같은데, 물론 이러다가도 폭설이 내려 그동안의 온기를 식혀버릴 수도 있는 변덕스러운 봄이겠지만, 그래도 반갑습니다. 첫 백신 접종도 이뤄졌고 앞으로는 봄기운 받아 앞다퉈 소생하는 푸른 새싹들처럼, 웅크리고 있던 모든 일이 따뜻한 기운 받아 정말 다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민정 작가.JPG 출처: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오늘 소개드릴 전시는 김민정(1962-) 작가의 개인전 《 Timeless 》입니다. (동명의 작품도 있어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영원한'의 뜻을 지닌 '타임리스 timeless'란 제목이 전시 출품 작품들과 참 잘 어울리지만, 부제를 넣을 수 있다면 저는 '사계四季'라는 두 글자를 자그마하게 적어두고 싶어요. 전시를 보고받은 인상이 딱 그랬거든요. 이번 전시는 《종이, 먹, 그을음 : 그 후》(2017)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으로, 그의 대표 연작 <Mountain>, <The street>, <Sculpture>, <Story>, <Timeless>와 새 연작인 <The water>, <Couple> 등 30여 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전시 무료, 사전예약 불필요)



김민정 작가는 광주 출생으로 현재 프랑스와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동양 미술의 대표 도구인 지필묵을 주재료로 하는 그의 작업에는, 바탕재이면서 메인으로 한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죠. '한지(로 그린) 회화'로 다분히 동양적인 요소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표현 방법과 조형 구성의 변주로 동서양의 정서가 모두 녹아들어 있습니다. 규칙은 있지만 일률적이지 않고 방법은 같지만 절대 녹록해 보이지 않는 이 작품들은, 그가 어렸을 때 배운 서예와 수채화, 대학 및 대학원에서 전공한 동양화,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 국립 미술원에서 유학하며 배운 모든 노하우가 결집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셨다는데, 어렸을 때 그곳에서 남는 종이를 가지고 장난감처럼 자르고 딱지도 만드는 등 놀았던 기억이 오늘의 그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지 않았나 싶네요. '유학을 가서도 가장 잘 다룰 수 있던 건 한지'라는 작가의 말을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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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작가 출처: (왼)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오)《 Timeless 》전시 영상 갈무리


전시는 특별한 구분 없이 1층, B1, 2층에서 진행됩니다. 저는 보통 1층 작품을 먼저 보고 지하로 내려가 관람한 후,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작품까지 다 본 후에 계단을 통해 1층 로비로 내려옵니다. 작가 및 전시 간략한 소개·작품 배치를 적은 인쇄물이 안내 데스크에 있지만, 입구 벽면의 QR코드 스캔으로도 온라인 리플릿으로 연결 가능하니 편한 방법을 택해 관람하면 됩니다.



작품들 대부분은 뽕나무 속껍질로 만든 한지 mulberry Hanji의 가장자리를 향불과 양초로 태워 겹겹이 포개거나 형태를 오리고 절단해 배치했고, 일부는 수채화 물감 watercolor이나 먹 ink으로 색을 쌓는(발묵) 기법도 사용했어요. 멀리서 봤을 땐 회화적인 시각적 시원함이 가까이에선 섬세하게 공간을 채운 공예 장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죠. 전시 소개 글에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는 한지의 강인함과 아름다움, 마치 수행을 하듯 호흡을 가다듬어 한지를 불로 태우는 행위, 그 조각을 섬세하게 배열하는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수작업... (중략) 나아가 윤회, 음陰과 양陽, 비움과 채움 등의 동양 철학적 사유와 깨달음을 동시대 미술 언어로 시각화"라고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1990년대엔 먹과 수채 물감의 얼룩과 번짐을 주 표현방식으로, 가장자리 종이를 향불과 양초에 그슬린 기법은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다고 하죠.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종이 콜라주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앞서 설명드린 이 몇 가지를 기억하고 전시를 보면 감상이 더 즐거워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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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 작품 중 사진: 네버레스 홀리다

1층 전시 작품 중 <Pieno di Vuoto>(2020), <Nautilus>(2020), <The water>(2020)


작품은, 처음엔 그냥 보고 후에 제목과 매칭 하며 보면 좋습니다. 내가 상상하던 형상과 작가의 제목이 일치할 때 주는 희열도 있고, 서로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보다 보면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들이 찾아지거든요. 가령, 서로 반대 의미를 지닌 (pièno(가득 찬, 정점)와 vuòto(텅 빈, 공허한)) 단어로 조합된 <Pieno di Vuoto>와 앵무조개를 뜻하는 <Nautilus>를 봤을 때 저는, (이탈리아, 터키) 유리공예와 비 오는 날 바닥에 생기는 물 파동과 로버트 스미스슨 Robert Smithson(1938- 1973, 미국)의 대지미술 작품 <나선형의 방파제 Sprial Jetty>(1970) · 소라껍데기 · 소용돌이 등을 떠올렸는데 제목을 보면 명확한 것도 다른 부분도 있잖아요, 분명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분들도 계실 거고요.



전시 관련 기사를 보니 <The Water> 연작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생태와 무한한 특성을 은유'하고 ‘살아 있는 화석’인 앵무조개의 외양에서 영감을 받은 <'Nautilus>는 '아름다움의 이상인 황금 비례와 영원한 시간성을 암시'했다는데, 영감의 원천과 은유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불가항력에 의해 묶인 듯한 에너지가 발산하듯 표현된 한지 조각의 치밀한 층위는 압도적입니다. 작품 크기가 대략 200cm × 140cm 정도라 그 효과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도 있어요. 살림이 좀 나아지면 꼭 한 점 소장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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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전시 영상 갈무리 사진: 네버레스 홀리다


지하에는 작품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있어요.(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어요) 이 영상을 보고 나면 '예술이 또 하나의 수행'이란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하실 겁니다. 한지 콜라주 작품에 사용한 종이(조각) 가장자리에는 공통적으로 그을음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지 끝을 촛불이나 향으로 태우고 곧바로 맨손으로 불을 꺼서 만든 효과죠. 작가는 "종이는 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약하면서도 몇천 년을 살아남는 질긴 존재"라며 "한지가 타고 남는 선은 종이가 없어지기 직전의 상태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한지 자체도 생산이 쉽지 않은 종이인데 거기에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수작업으로 불의 선과 색을 더해 ‘비움의 채움’, 윤회, 음양 등의 동양적 사유와 깨달음을 동시대 미술 언어로 시각화했다는데, 탄복했어요 그 디테일에.



“작업을 하면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 상태가 돼요. 제가 작업하며 느낀 것들이 관객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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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전시 작품 중 사진: 네버레스 홀리다

B1 전시 작품 중 <Sulpture>(2020) , <The Room>(2019), <Corner>(2019)



지하 전시실의 작품들은 대부분 가지런히 자른 한지의 끝을 태워 재를 털어내고 순서대로 그 자리에 다시 붙여 완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멀리서 보면 드로잉 같고 가까이서 보면 규칙적인 치밀함에 깜짝 놀랍니다. 추상 회화나 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한히 증식되는 공간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묘해요. 살짝 무서워지기도? 한다니까요 이렇게 긴 호흡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물학적 흐름으로 인한 돌연변이 현상으로 시간을 감지할 뿐이다.

나는 산을 그리고, 자르고, 태워 조수潮水를 가두고 붙인다.

산의 흔적은 영겁의 해류의 소리가 된다.

먹의 띠가 만든 수평선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 김민정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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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전시 작품 중 사진: 네버레스 홀리다

2층 전시 작품 중 <Mountain>(2021), <The street>(2020), <Story>(2020) 사진 : 네버레스 홀리다



2층 작품들은 좀 더 대중적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Mountain> 시리즈는 가장 엷은 먹을 겹겹이 쌓아 먹의 농담으로 완성한 산수화입니다. 원래는 바닷물이 끝도 없이 들어오는 파도의 소리를 시각화하고 싶었는데, 완성 후 다시 보니 파도의 소리보다는 산의 형상에 가까웠다고 하죠. 그래서 <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해요. 산은 산인데 바탕에 촘촘히 붙인 한지 덕에 물결 같은 느낌도 나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거리> 연작은 호수 위의 연잎, 비 오는 날 거리에서 우산들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을 연상케 하고요.



"신이 아닌 인간이 어떻게 창조를 할 수 있을까?

영감은 우리 주변에 떠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그 영감이 떠돌아다니다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두는 작업이 작가에겐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놓아야 하죠.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더 가까이한다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저의 경우는 종이를 태우며 완전히 집중하고 잡념을 잃게 되는 것. 마음속에 들어있는 상념을 없애는 것. 그런 것을 반복하면서 이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김민정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인터뷰 재인용)


최근 출간된 'Phaidon'(영국 대표 아트북 출판사)의 『 Vitamin D3: Today's Best in Contemporary Drawing Phaidon Editors 』에는 에디터들이 뽑은 베스트 컨템퍼러리 드로잉 작가로 김민정 작가가 소개되었어요. 작품도 영국 대영박물관 등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꼭 이런 수식어가 없어도 작품이 좋습니다.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갇힌 전시장에서 바람소리도 들리고 빗소리도 들리고, 꽃도 피고, 마냥 바라보고 명상도 하게 할 만큼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좀 이르지만 봄바람으로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다면 시간 내서 가보길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갤러리현대에서 5분 내외 거리에 있는 학고재에선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 》(2021.2.17-2021.4.3) 전시가 진행 중이니, 한지 위에 그린 채색 초상화도 함께 감상해보세요. 내일이 3·1절이니 더욱 의미가 깊겠죠. 윤석남 작가와 관련된 제 이전 블로그 글(2019)도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https://www.galleryhyundai.com/exhibition/view/20000000018

http://www.minjung-kim.com/

https://brooklynrail.org/2020/06/art/MINJUNG-KIM-with-Helen-Lee

https://www.phaidon.com/store/art/vitamin-d3-todays-best-in-contemporary-drawing-9781838661694/


윤석남 작가 관련 이전 블로그 글

https://blog.naver.com/neverlesshollida-1/221716709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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