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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Dec 22. 2020

시간을 아껴 쓰는, 슬픔

이반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오늘,


교통정리를 하다 차에 치인 젊은 경찰관 하나가 죽었다.

결혼한 지 4개월이 지났고

풋사과처럼 싱그러울 새댁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오늘,

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젊은 남자 하나가 죽었다.

오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불어 터진  눈칫밥이 도무지 삼켜지지 않았던지,

철없는 넋두리려니 했던 한숨 섞인 탄식만 남기고는 홀연히, 갔다.


오늘,

젊디 젊은 실습생이 왔다.

그들은 젊음의 특권으로

무한히 펼쳐진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시간은 기어코 가고야 마는 것이지만,

그때가 언제 올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언제쯤 익숙해질지, 언제쯤 승진할지, 언제쯤 원하는 과에 갈 수 있을지 아이처럼 조급해했다.


젊음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 쓸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죽음 앞에서 젊음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내 기분이 그러하다.


젊지 않은 탓에 시간을 지루하게 늘려 쓰고 싶다.

어제 일은 아득한데 먼 일은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필시 내가 시간을 더 늘려 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우악스럽게 삼켜대는 삶의 허울들이 워서 지루하게 시간을 늘려 한 줌씩 꺼내 아껴 살아 있고 싶다.


젊지 않은 마음은 외롭고 서글프다.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폭우 속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굵은 빗방울이 후두려 패도록 내버려 둔 바람에 푹 젖은 몸뚱이가 무겁기만 하다.

이반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외쳤듯

삶의 모든 것이

거짓, 또 거짓이라

누구나 고독 속에 고통스레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잠시 잊게 할 가림막일 뿐인가 싶다.

굳어 갈라진 메주처럼 오래 묵은 슬픔과

가난에 절은 어설픈 위악과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지닌 결핍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초라해지고 우스워져도

먹고살자고, 그냥저냥 사는 게 인간인데,

젊은 인생들이 자꾸만 바스러져 허망하다.


숨 가쁜 행정 용어로 요약되 저무는 젊은 인생들 앞에 나는,

더 이상 젊을 수 없다.



요즘은 어었을 적 흘려 봤던 영화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본다.

신들의 목욕탕을 운영하는 마녀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뺏는 장면에서 자꾸 눈물이 난다.


남들 다 읽는 책이라 미뤄뒀던 소설에서

시간을 저축하느라 도무지 사랑할 시간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에 심장이 돌처럼 묵직해져 또 눈물이 난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이 빛으로 변해갈 때,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으면 삶이 없는 덕분에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두려워했던 생명체의 고통이 죽음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게 된 그 순간,

'이제껏 잘못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시시비비의 감옥에서 그를 구원했던 건 아들의 눈물이었다.


눈물은 갓 구운 빵처럼 말랑한 슬픔이다.

아이처럼 울고 나면 가슴에 뭉근히 남은 열기가 개운한 바람에 씻겨간다.

그 순간만큼은 조각조각 사라지던 시간들이 잠시 멈추어 구름다리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래서

울지 못하는 자는,

타인의 슬픔을 질투한다.


평생 죽음 곁에서 엄마만 보고 살다가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 작고 왜소해서 친구 하나 없는 그 아이에게

기러기 아빠인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나약하게 굴지 말라 충고하던 그 못난 어른도,

아이의 슬픔을 질투해서 침을 뱉었던 게 틀림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도무지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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