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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숙 May 15. 2023

장기 스승 할아버지

추억은 바람을 타고 온다

스승의 날 아침.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타서 가장 좋아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얼굴을 살며시 간지럽힌다.


1988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큰아들 집으로 오셨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늦둥이였던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딱히 놀 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할아버지가 하시는 장기가 신기했다.


“할아버지, 장기 가르쳐 주세요?”


할아버지는 손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할 일이 생겨 기뻐하셨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와 손녀의 장기는 매일 이루어졌다.


“장기는 파란색 초(楚)와 빨간색 한(漢) 두 팀으로 나누어진다. 각 팀에는 16개의 말이 있다. 장기는 각 팀의 대장 장기를 먹으면 이기는 진법 게임이다. 초(楚), 한(漢), 사(士)는 직사각형(궁성)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차(車)는 가장 강력한 말이다. 가로막는 기물이 없으면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직선 이동 가능하다. 포(包)는 차와 비슷하지만 앞에 하나의 기물이 있어야만 이동할 수 있다. 같은 포(包)끼리는 절대 넘어갈 수 없다. 마(馬)는 장기판의 선을 한 칸 이동한 뒤 대각선으로 한 칸 이동할 수 있다. 이동경로에 기물이 있으면 이동할 수 없다. 상(象)은 장기판의 선을 한 칸 이동한 뒤 대각선으로 두 칸 이동할 수 있다. 이동경로에 기물이 있으면 이동할 수 없다. 쫄(來), 병(兵) 한 수에 한 칸씩 이동이 가능하고 뒤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궁성 안에 진입했을 경우 대각선을 타고 이동이 가능하다. 서로 왕을 잡지 못하는 경우에는 남은 기물이 많은 쪽으로 승부를 가린다.”


할아버지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하는 방법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할아버지가 쫄(來)을 움직이면 나도 똑같이 쫄(來)을 움직였다. 할아버지가를  마(馬)움직이면 똑같이 마(馬)를 움직였다. 여러 번의 반복 게임을 통해 나름 나만의 요령이 생겼지만 할아버지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외침이 들린다.


“장군이요!”


장군이라는 소리에 놀란 나의 뇌는 바삐 움직였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사(士)로 겨우 막을 뿐이다. 또 한 번 할아버지의 외침이 들린다.


“장군이요!”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특유의 웃음을 지으셨다. 그 순간만큼은 할아버지가 너무 얄미웠다. 이번 판도 할아버지에게 졌다. 씩씩거리며 할아버지 방을 나왔다.




방학이 되자, 사촌 율이가 놀러 왔다.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는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 가르쳐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율이를 열심히 가르쳤다. 율이는 생각보다 쉽게 장기를 익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이겼다. 이후 할아버지와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다. 할아버지도 어린 손자의 장기 실력에 곤혹스러워 보이셨다. 그렇게 몇 번에 “장군이요, 멍군이요.”를 외치더니 이게 웬일인가. 율이가 할아버지를 이겼다.

나는 신이 나서 율이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 기억나세요? 긴긴 시간 장기를 통해 이겨낼 수 있었잖아요. 장기를 둘 때면 그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아이와 함께 장기를 두면서 할아버지에게 배운 모든 진법들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가르치는 건지 제자들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할아버지와 한번 더 대련하고 싶은데 그 시간은 언제가 될까요. 언젠가 만나가 되면 꼭 다시 한번 승부를 내고 싶습니다. 언젠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 만나 뵐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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