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물이 끓는다.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디쯤의 시간. 고요한 새벽에 나는 홀로 커피를 탄다.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맥심 커피가 담긴 종이컵에 붓는다. 쪼르륵. 설탕과 프리마가 녹아 향이 달달하다. 찬 공기를 마주하고 창가에 앉아 따뜻한 맥심 한 잔을 마신다. 맥심은 물 양이 중요하다. 진하게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을 붓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을 온전히 즐기겠다면 천천히 부어야 한다. ‘이 정도면 부족하지 않을까' '더 부어볼까' 싶을 때, 그때가 딱 적당하다.
대학 시절, 나는 아메리카노보다 맥심이 좋았다. 세상의 쓴맛을 아직 못 봐서 그랬을까. 단 맛에 더 손이 갔다.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를 멋 부리며 들고 다녔을 법도 한데, 나는 종이컵에 마시는 그 맛, 그 기분이 좋았다. 그땐 그렇게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그 시간이 좋았다. 밤샘 공부에 힘이 되어준 것도 맥심이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늦은 밤, 독한 에너지 드링크는 몸에 맞지 않아 커피로 잠을 이겨냈다. 커피를 마신다고 잠이 안 오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잠이 달아나는 기분이랄까.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새벽의 맥심 한 잔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학점 관리, 영어 공부, 취업 준비로 매일 지치고 고된 일상이 반복됐다. 그토록 바라던 취직을 했을 때는 업무에 적응하고 상사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다. 열심히 했지만 처음이다 보니 어려운 일이 많았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사니까 조금만 참아"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조차 상처가 됐다. 완벽하고자 했던 마음을 누르고 맥심 커피를 타듯 조금은 부족하게, 천천히 물을 붓듯 욕심내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까. 어지러운 마음을 맥심 한 모금과 함께 삼키곤 했었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나는 여전히 바쁘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한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쉴 틈 없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잠시 여유가 생기면 물을 끓이고, 맥심 스틱 하나를 뜯는다. 조용히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면 가끔 이십 대의 날들이 생각난다. '우리'가 아닌 '내' 일을 하던 그때. 나의 미래만 걱정하던 날들. 새벽의 찬 공기와 맥심의 향기가 그리워졌다. 아니,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