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책방 19호실]
'언니! 나 지금 출발해. 11시쯤 도착할 것 같아.'
날씨는 밝고, 맑고, 따뜻했다. 책방 가기 참 좋은 날이구만. 태연의 '꿈'을 틀어 놓고 맘껏 흥얼대며 1시간 반쯤 달렸다. 그렇다. 이 [책방 19호실]은 내가 친애하는 그녀의 책방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만난 대학 선배 언니. 가장 찌질하고 우울했던 고시생 시절과 지단한 연애의 희로애락을 공유한 사이. 아이 낳고 사느라 소원했던 시간의 강을 지나 이제는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의 아귀를 맞추며 이어가는 사이가 되었다. 오랜만의 만남이, 그녀의 책방이 너무 궁금하고 기대된다. 오늘의 책방은 정말이지 사심 가득한 이야기다.
그녀의 [19호실]
창원대학교를 지나, 도청 언저리에 다다르니 불현듯(느낌상 갑작스럽게 나타난) 골목이 보였다. 순도 100프로 주택가의 모습이다. 이런 곳에 책방이? 정말? 어디에? 갸우뚱하다 모퉁이에서 마주했다. 책방 19호실. 여느 작은 책방들이 그러하듯 크고 눈에 띄는 간판은 없었다. 샛노란 차양막이 반길 뿐. 와! 19호실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부는 소박한 듯 화려하고, 그럼에도 따뜻했다. 그녀의 느낌과 정말 닮은 공간이다. 청록의 벽면과 우드색 책장이 오묘하게 어울리고, 패브릭과 액자로 포인트를 준 모습이다. 누구든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와, 여기 뭐야?!' 생각이 들 것만 같다. 바닥의 단차도, 카펫을 깔아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는 것도 귀여웠다.
ㄷ자의 책장에는 그녀와 대중의 취향을 적절히 버무린 책들이 숨구멍 있게 진열되어 있다. 세로, 가로, 눕고, 서고. 모든 책이 어떤 마음에서 놓여 있는지 음미할 수 있어 재미있는 책장이다. 그녀 취향의 시집, 문학작품, 가볍게 읽을 에세이, 여행, 예술 작품들이 눈에 띈다. 여성주의 작품들도 꽤 보였다. 책장의 이곳저곳에는 주인의 코멘터리가 붙어 있다. 애정이 살살 풍기는 글귀를 읽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었다.
내가 책방에 앉아 있던 두어 시간 동안 꽤 많은 손님이 드나들었다. 부러 찾아온 사람 같기도, 근처의 직장인 같기도 했다. 잠깐이나마 여기에 머물며 책장의 글귀와 책을,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런 손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언니는 무심하지도, 주목하지도 않으며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
신발을 고쳐 신는 손님에게 "양말이 너무 귀여워요!" 함께 웃는 여유도 가졌다. 그게 이 곳의 매력일까. 유동인구라고는 없는 이 골목에 사람이 보였다 하면 곧! 이곳에 오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들렀던 손님의 취향마저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녀였기에 또 오고 싶은 서점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곳에서는 ’뮤트 북클럽'이라는 특색 있는 모임은 물론, 매일 쓰기, 시 쓰기, 우살롱(우울한 엄마들의 살롱) 등 다양한 모임을 주관한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과 소통할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애살스러움이 느껴져 그저 미소 지었다.
어떤 느낌이라 해야 할까. 다락방보다는 서재에 가깝고, 서재보다는 거실 같은 느낌. 너무 프라이빗해서 들어가기 버거운 공간은 아니면서 적당히 아늑하다. 뭐든 가능할 것 같은 테이블과 공간과 사람이 있었다. 아마 그녀가 운영하는 곳이 아니었대도 나는 기꺼이 방문했을 것이다. 그녀의 19호실은, 이미 모두에게 어느 만큼의 19호실이 되어 있었다.
19호실의 [그녀]
그녀는 왜 [책방 19호실]이라 이름 지었을까. 19호실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서 가져온 단어라 했다. 책 속 수전이 간절히 원했던 19호실을 보면서 답을 찾았다.
수전은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소중했다. <19호실로 가다> p.332
"효나야, 있잖아. 언니 책방 연다. 이렇게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책방을 연다는 게 무모할지 모르겠는데. 수도시설이 없는 대신 월세가 싸. 지나가다 힐끔 눈이 갔던 자리였는데 글쎄 '임대'라는 글씨가 보이는 거야. 운명인가? 생각했고, 계약했어. "
2021년 1월. 전화기 너머 언니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한껏 달떠있었다. 얼결에 시작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꿈꿨음을 안다. 언제 책방을 연다 해도 의아하지 않다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창원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쉬지 않고 해 왔던 그녀였다.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기쁘고 행복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시작한 그녀의 창원살이를 처음 들여다본 감회는 새로웠다. 아니, 오묘했다. 책방이라는 공간에 앉아 '내가 모르는 시간 속 그녀의 삶'을 관찰하는 희소한 경험을 했다. 손님이 들어오고, 책을 골라 사가는 모습. 손님을 맞고, 문밖까지 배웅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여러 번 마주했다. 동네 동생과의 통화소리, 책방에 틀어둔다는 오웬과 허수경의 노래까지.
직접 본 적 없던 그녀의 '진짜' 삶을 본 것 같다. 더불어 그녀의 '창원사람들'까지. 진귀한 시간이다. 마음이 폭닥해진다. 이곳에서 언니, 외롭지 않게 잘 지내고 있구나. 뿌리 내렸구나. 역시 언니는 생명력이 강한 사람이다.
평소 시를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시를 써서 최근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기쁜 소식도 전했다. 역시 뭐든 어중간하게 할 사람은 아니다. 책방에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영화 '미나리'의 대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건강하게 해 줘."
그녀는 뿌리 내렸고, 잘 자랐고, 이 곳 사람들에게 이미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효나야, 네가 좋아하는 게 프리지아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어제 저녁에 몇 송이 사서 꽂아뒀다?!"
프리지아의 진한 향이 그녀의 말소리에 섞여 코끝에 맴돌았던 그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향기가 코에 닿을 때마다 언니의 마음에 뭉클했다. 그녀는 19호실을 찾았다. 아니 만들어냈다. 이 공간을 찾는 누군가에게도 그런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했다.
내 19호실은 어디일까. 여기 이 곳이 우리 옆집이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망과 그렇지 못할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책방 19호실의 그녀, 박지현 님의 공간이 앞으로도 깊고 진한 향을 머금기를. 그 향이 퍼져가기를.
이효나 작가 브런치를 보고 방문했다 해 보시라.
이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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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반갑게 인사를 해 준다는 소문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