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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May 17. 2019

문학동네시인선100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도서리뷰_ 문학동네시인선100

문학동네시인선100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시를 읽는 일은 발견이며 환희이며 성찰이다. 그러나 시를 읽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시집을 읽는 일은 위의 모든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 

문학동네시인선에 올라오는 시집을 몇 권 구입한 적이 있다. 

그런데 잘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100번째 문학동네시인선 <100기념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를 구입한다. 

이 또한 어려웠다. 


34쪽에서 김경인 시인이 말한 심심(心心), 심심(深深)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언제나 상황(사회)과 사람(관계)에 대해 "마음"을 쓰며 살고, 그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깊이"를 가늠하지도 기록하지도 못하는 게 또 지금의 마음인 것 같다. 

시란 무엇일까? 시를 왜 읽는 것일까? 왜 시를 써 보고자 하는 것일까? 

혼자 많은 질문을 한다. 답은 없다. 그래도 질문한다. 


그렇다면, 

시는 -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하고 스스로 답을 차게 하는 - 곧 내 삶이며 내 마음이며 내 깊이의 돌아보게 하는 "성찰"이 아닌가 싶다.  


230쪽에서 홍지호 시인은 산문<끝나면 안 되는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슬프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는 시입니다

시는 다만 시에 도달해야만 시가 될 수 있었던 것 동시에 시에서 멈춰야만 시가 될 수 있는 것  

슬프게도 나는 나입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앞의 문장들을 쓰고 마침표를 모두 지워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침표를 '그러나'로 다시 찍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인 시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시인의 고뇌의 말이, 시를 쓰는 일, 시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는 것 같아서 냉큼 받아 적었다.  


220쪽에 있는 한영옥 시인의 시 한 편 


측은하고, 반갑고  


딸 많은 우리 어머니 / 이 딸에겐 저 딸 얘기 / 저 딸에겐 이 딸 얘기 

점잖으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던걸 

이 사람에게 저 사람 흘리고 / 저 사람에게 이 사람 흘리고 

사람이 모질어서 그런 것 아니라네 / 말이라는 게 원래 정처가 없다네

오래전 고향을 잃었다는 낭패감에 / 외롭고 허전해서 불쑥불쑥 앞질러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것이네 

모르는 새 앞지른 말 놓쳐버리고 / 울상 지으며 안절부절하는 이여 

괜찮네 본심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네 

우리의 말, 늦가을에 다시 피어나는 / 봄꽃처럼 얇아서 늘 조마조마하던걸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주름 / 그걸로 충분하네 이해가 오고 있네 

측은하고 반갑고 또 많이 고맙네 


본심이 아니었다고, 고맙다고 - 이런 말들에 대한 시인의 마음(저의 底意)가 느껴지는 시이다. 

"사과의 말은 이렇게, 고맙다는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라고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가르쳐 주는 것 같다.  


*** 


시를 읽는 일은, "세속의 발견이며 지적인 환희이며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늘 그렇듯이, 때로는 오묘하고도 명민한 문장으로 세태 풍속을 노래하고, 때로는 아름답거나 거친 문장으로 지적 충만함을 채워주고, 때로는 가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내 삶을 휩쓸고 지나간다.

시를 읽으면서 생채기가 날 때가 있고, 뜨거운 위로를 받을 때도 있다.  


이 시집에는

문학동네시인선의 101번째부터 150번째까지 선보일 시인들의(몇몇 빠진 이들도 있지만) 시와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의 제목인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도 이 시집 126쪽에 수록된 오병량 시인의 시 <편지의 공원>에서 따온 것이다.  


시집을 읽는 일은 시인들의 "산통産痛의 애씀"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다. 40여명이나 되는 시인을 한 번에 (미리)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158쪽. 이수경 시인 <지금 세상은 가을을 번역중이다> 


구름이 태어나는 높이 /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서 / 새를 날리는 바람의 가짓수

들숨과 날숨의 온도 차 / 일찍 온 어둠 속으로 / 숨어드는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 / 밤새 씌어졌다 지워질 때 / 비로소 반짝이는 

가을의 의지  

고르고 고른 말 / 이성적인 배열과 / 충동적인 종결  

각자의 언어로 / 번역되는 가을  


이 시에서도 어휘 선택과 행의 배열을 위해서 애썼을 시인의 고통이 느껴진다. 

높이, 순서, 가짓수 등의 시어들은 번역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세심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결국 시를 읽는 일은, 왜 이 어휘가 사용되고 배열되었는가를 반추하게 하고, 다시 그 어휘 속에서 숨겨진 시인의 의도(저의)와 사물(세상)이미지를 독자만의 방식으로 끄집어내는일인 것 같다.  


짧은 글을 읽는 묘미는 그런 것 같다. 

읽어야 되는 시인의 짧은 시보다, 어쩌면 더 길게 길게 끄집어내는 읽는 이의 심심(心心), 심심(深深)을 더 깊게 오래오래 읽어야 되는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독자인 '나'와 '세계'를 알아가기 위해 , 시를(시집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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