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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브랭 Oct 25. 2020

권리만 주장하지 말라고?

워킹맘 20

나는 근로계약을 1년 단위로 반복하는 계약직으로 일했다. 몇 번의 이직을 거쳤으나 비슷한 업종이라 업무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처우도 똑같았다.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정규직과 다른 점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정규직 신규 입직이 거의 없는 분야였기에 정규직은 대부분 연령대가 높았고, 젊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계약직이었다. 업무에 있어 계약직이라고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권한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은 담당하지 않았다. 주로 실무자로서 일했는데, 직급이 낮아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등하게 근무했다.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임신을 하게 되니 정규직과 다른 점이 피부로 느껴졌다. 회사의 취업규칙에 따르면 정규직이던 비정규직이던 임신 출산 육아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회사 창립 이후 계약직 여직원이 임신을 한 경우가 처음이라 했다. 더 정확히는 여직원의 임신 출산 자체가 드물다고 했다. 취업 면접 때 결혼 여부를 묻지 않는 유일한 회사여서 좋았는데, 그 이유가 여직원의 임신 출산을 고려해 본 적 없는  조직문화였기 때문임을 알게 되어 놀랐다.


어찌 되었든 임신 사실을 통보하고, 임산부 단축근무를 신청했다. 회사에는 임신 전 기간 동안의 매일 2시간의 단축근무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2시간의 근무시간 단축을 사용하는 것은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대표는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임산부로서 사용할 수 있는 법적인 제도를 사용하라고 했지만, 인사관리자는 회사의 상황상 매일 2시간의 단축은 불가하다고 했다. 매번 같은 식이었다. 제도는 있으나 회사 경영상의 이유로 반려되었다. 딱 하나 임산부의 야간근로를 제한하는 법이 있어 야근만은 면제되었다. 입덧기간에도, 갑작스러운 하혈에도 임산부의 안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반쪽짜리 인력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야근을 공식적으로 면제받게 되자 남은 직원들에게 업무가 가중되었다. 단축근무를 쓸 수 있게 업무를 경감시켜 주겠다더니 결과적으로는 다른 직원에게 떠넘기듯 업무를 배분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부서장은 나를 불편해했고, 부서원들은 나 때문에 업무를 추가로 떠맡게 되어 싫은 내색을 대놓고 했다.


매년 이루어지는 재계약 시즌에 완전히 배제되었다. 내년도 업무나 계약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법적으로는 계약기간 만료로 인한 해직 시에도 퇴직일 30일 전까지 계약해지에 관한 내용을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자는 근로자에게 한 달치의 급여를 지불해야 한다.) 가시방석이었다. 노동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퇴직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예상했던 바였다. 마침 계약 종료일 이후에 출산할 예정이라 남은 연차를 마지막에 몰아 쓰고 퇴직하는 것으로 정했다. 미리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사준비와 출산준비를 했다.


차근차근 업무를 정리했다. 그러다 회사일정상의 이유로 퇴사일 마지막 일주일에는 반드시 전 직원 출근하라는 갑작스러운 지시가 내려왔다. 내년도 업무분장과 조직개편을 위해서라고 했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내용이었고, 내년도 업무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까지 출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팀장에게 연차를 사용하겠다고 보고했고 상식적으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표는 그렇지 않았다.


대표와의 면담에서 내가 출근할 이유가 없으니 미리 보고했던 대로 개인 연차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연차보상금이 없다) 그러자 대표는 불가하다고 버텼고, 그렇다면 나는 출산휴가를 사용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표가 격분하며 권리만 주장하지 말라고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권리만 주장하지 말라고? 당황스러웠다. 노동자가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뭘 해야 하는 걸까. 임산부라서 반쪽짜리로 취급한 걸까. 그럼 그동안 전전긍긍하며 업무하고 눈치 보고 힘들어 한건 괜한 일이었나 싶어 어지러웠다.


2020년 1코로나 사태가 급작스럽게 터지면서 임산부의 재택근무 지침이 내려왔고, 나는 재택근무를 끝으로 퇴사하였다. 그리고 퇴사 3일 후, 예정일보다 한참이나 빠르게 출산했다. 다행히 조산은 아니었지만 퇴사 과정에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사건들 이후에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직업상담을 공부한 계기이다. 출산 후 조리원에서 공부한답시고 책을 보는 미친 산모였고, 결국 직업상담사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산부나 워킹맘이 있다면 내 능력껏 도와주고 싶다.




그래도 좋은 직장이었다. 인사팀에서 퇴사 3일 후 지난해 성과급에 대한 친절한 안내전화를 하며 안부를  물어주었다. 바로 2시간 전에 출산을 했다는 내 답변에 너무 놀란 듯했지만 다정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성과급 평정은 공정하게 이루어졌으며 고과 A를 받았다.(S-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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