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오래 어린애로 있고 싶어.

열세 번째 질문, 머물고 싶었던 시절에 대하여...

by 나작

로리와 함께 내리막길을 한바탕 뛰고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조, 하필 마침 그곳을 지나던 메그에게 들켜 잔소리를 듣는다. 조는 언니 메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던 터라 서운하다. 즐거운 소녀시절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난 최대한 오래 어린애로 있고 싶어.
Let me be a little girl as long as I can.


열세 번째 질문, 머물고 싶었던 시절에 대하여...


모두의 어린 시절이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행복하다거나, 신난다거나, 즐겁다거나 하는 감정을 별로 느껴보지 못하고 유년기를 지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어 있는 편이었다. 굳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자라는 동안에는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과 해야 하는 것들이 강요되기 마련이다. 그 제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아이들도 있겠으나, 나는 아주 낮은 문턱 하나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였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그랬다. 어린 시절이 지긋지긋하고 답답했다. 유년기의 순수함을 찬양하는 글들에 공감하기 어려웠고, 그때가 좋을 때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근심걱정 없이 즐겁기만 했던 시절은 바로, 비로소 '어린 시절'을 벗어난, 스무 살이었다.


등교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 매일 똑같은 공간에 똑같은 사람들과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심지어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혼내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대학교는 비로소 내 자유가 실현된 장소였다. 그것이 학문의 자유가 아니었다는 점은 좀 안타까운 지점이긴 하다(나는 가까스로 학사경고를 맞지 않을 정도의 점수로 대학교 1학년을 마쳤고, 형편없는 점수로 졸업했다).


"얘들아, 나 왔다!"

동아리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소리치는 발랄한 여학생이 있었다면, 그건 나였다. 매일 삼삼오오 모이는 술자리에 결코 빠지지 않는 시끄러운 핵인싸가 있었다면, 그것도 나였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친구인 극 외향인 친구가 있었다면, 그 역시 나였다. 밝은 에너지 속에 있으니 다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나도 만나는 사람마다 다 좋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혼자 우울하게 앉아 있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그렇게 봉인해제가 되었다.


스무 살의 여름은 무척 바빴다. 엠티도 가고, 관측회도 가고(천체관측 동아리였다), 마음 맞는 몇몇 친구들과 소규모 여행도 다녔다. 한편으로는 썸을 타다 차이고, 또 다른 연애를 하고, 연애에 실패한 다른 친구들과 술을 마시느라 집에 있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공부니 미래를 위한 준비니 진지한 것들은 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현재를 즐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가끔 의아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유년기에도 없었던 명랑함이 날개를 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실패한 연애 앞에서 어린아이 때보다 더 투명하게 엉엉 울 수 있었을까. 어떻게 매일 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잠들 수 있었을까. 그때의 나를 가장 나다웠다고 말해야 할지, 드물게 나답지 않았던 시절이라고 해야 할지 고개가 갸웃해진다.


스무 살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친구들이 하나 둘 도서관으로, 토익학원으로 흩어지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그저 스무 살에서 일 년만큼 멀어지고, 또 한 해가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아직 어린아이인 채로 그 자리에 멈춘 기분이었다. 나의 영혼은 어쩌면 벤자민버튼처럼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한때는 참 한심했다고 여겨져서 그 시절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 준비없이 덜컥 사회로 나와 방황하던 때를 지나면서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낮아진 자존감 앞에 지난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스무살의 나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니, 문득 전에 없던 순수함과 솔직함 그리고 무한히 확장되어 가던 두려움 없는 에너지가 그리워진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대책 없는 낙관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에서 모리는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지"라고 말한다. 내 안의 어딘가에 여전히 스무 살이 남아 있을까. 이젠 그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정말 빛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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