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이력서를 채워주는 것

by 나작

하루 종일 이력서를 매만졌다. 보잘것없는 이력이다.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럭저럭 학위도, 경력 연차도 채웠지만 역시 어딘가 허술하다. 똑똑하게 좀 더 “있어 보이는” 경력을 만들 기회도 있었을 텐데, 후회해 봤자, 어차피 이 이력 중에 내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다. 한 국가의 현장에서 10년, 개도국에서 석사. 보통 국제개발협력 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걷는 길은 아니다. 대표 말대로 좀 “특이한” 이력이다.


작년 가을에 B사로 면접을 보러 갔었다. 당장 취업이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궁금했던 업체라 지원서를 넣어봤다. 채용공고의 문구와 홈페이지의 소개글에서 정성 들여 어필하고 있는, 위계 없는 조직의, 젊은 세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새로운 방식에 열려있는 표현들에 호감이 가면서도 묘하게 거부감도 들었다. 부드러운 문장들 속에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깐깐함 때문이었을까. 다 열려 있다는 듯한 태도 속에 숨겨진 답정너를 읽어내야 하는 부류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면접은 무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팀장을 뽑는 자리였는데, 내가 조직관리나 인사관리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걸 여실히 깨달은 날이었다. 현장에서 가이드라인도 없이 맨땅에 헤딩만 하다가 지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작은 단체에서 3년간 팀장직 업무를 한 적이 있었다. 몇 되지 않는 직원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조직에서 팀원이랄 것도 없이 직함만 팀장인 직책이었다. 업무 시스템도 없고, 국장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이 흘러가는 구조였는데, 일하는 직원들도 다들 그다지 열정이랄 것도 없이 스트레스 없이 놀러 나오는 분위기였다. 어딘들 다 비슷하지 뭐, 하는 삐뚤어진 마음으로 어영부영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기간 동안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현장 활동에 대한 질문들에 어느 정도 대답을 이어가다가, 팀장직이었을 때의 경험들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나중엔 자포자기로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나왔다. 이 나이에 맡을만한 직책에 필요한 역량이 지금 나에게 없었다. 대표와 2명의 면접관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친근한 미소를 띠고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래도 나에게 호감이 많은 사람들 일지 모른다는 착각을 할 만큼.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채용공고나 지원과정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물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추구하는 가치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고심했을 것이 분명한 자기소개서의 질문목록이나,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도 모를 사람과의 면접을 두 시간이나 할애하는 것도 그랬다. 면접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준비 없이 면접을 한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까지 해버렸다. 조금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중에 전화가 왔다. 멀리서 오셨으니 교통비를 정산해 주겠다고 했다. 고속버스 왕복 결제내역을 담당자에게 보냈고, 며칠 후에 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수 없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지난겨울에 단기 조사팀에서 함께 일했던 전문가 한 명이 B사에서 이번에 기획조사팀을 꾸리는데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괜스레 뜸을 들였다. 두어 달 정도의 단기계약이고 다른 직무이긴 하지만, 면접 보고 탈락시킨 사람을 받아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소개해달라고 답을 보냈다. 거절당할까봐 먼저 거절하는 것은 결국 후회만 불러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면접 때 만났던 대표에게 전화가 왔고, 서로 조금 민망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는 나에게 이번 조사에 적합한 경력을 가진 것 같다고 했다. 작년에도 대표는 내 이력에 관심을 보였었다.


내 이력서는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채웠어야 하는 건 뭐였을까. 영어점수와 자격증같은 것으로 채워보려 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게 진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회피해왔다. 부정적인 경험으로 만든 색안경으로 세상을 마주하면, 모든 일의 진의를 의심하고 나를 방어하느라 내가 놓친 것을 보지 못한다. 어느새 나는, 그 일은 그만두고 앞으로 글을 꾸준히 쓰며 살겠다는 다짐으로 도망 와 있었다. 다시 업무를 마주하고 나니,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결국 글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채우고, 마음을 다 한 후 물러나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나는 글이든 어떤 일이든, 또 다른 피난처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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