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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12. 2022

장강명 '표백', 20대의 치열한 선언

표백, 장강명, 2011



표백된 청춘의 우울함


나의 20대는 매일 같이 친구들을 만나 웃을 일도 많았지만, 내면은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내세울 것 없는 보잘것없는 현실에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두려움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어우러져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같은 생각이 밤마다 고개를 쳐들었다. 소설 속의 '나'가 청춘을 보냈을 시기는 아마도 나의 청춘과 같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야기는 '세연'이라는 인물이 세상을 향해 던진 '선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위대한 일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모두 차지해버렸다. 이제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개인이 가진 신념, 관점, 취향, 꿈 등이 모조리 '표백'된 채로 사회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일 밖에는. 과거의 청년들은 혁명에 참여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했지만 현대의 청년들은 스펙을 쌓고 정해진 직업의 굴을 재빨리 찾아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개인을 드러낼 수도 개인의 위대한 사상과 신념을 이루어낼 수도 없다.


소설 속 세연과 그녀의 선언을 따르던 친구들의 이러한 관점은 내가 소설이 발표된 10년 전에 읽었다면 열렬히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스물여덟살에 같이 일하던 분이 "김대건 신부가 몇 살에 순교하셨는지 아니?"라고 물었을 때 얼버무리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을 뿐이다.




완성된 사회 속 절망을 표현하는 방법


소설에서는 이렇게 이미 틀이 잡혀진 사회를 '완성된 사회'라고 불렀다. 나는 그 당시에 이 사회를 '만들어진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청춘을 보내는 사람들이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연과 친구들은 논리적 비약이 난무하는 '선언'을 통해 세상에 항의하는 한편,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인생의 절정의 순간에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세연의 친구들은 목표하던 무언가를 이룬 후에 곧바로 '선언'을 실행에 옮겼다. 반면 '나'는 간신히 7급 공무원이 되어 칼퇴 후 글을 쓰겠다는 꿈은 저 멀리 날려버린 채 살아간다. 7급 공무원에 합격한 것 자체도 누군가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인데 소설에서는 장렬히 몸을 내던진 친구들과는 대조적으로 실패한 모습이다.


우리는 보통 소설 속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의 경우엔 20대를 통과하는 내내 '잘못된 선택'을 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에서 말이다. 스스로 사회의 부속품이 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가장 나를 위하는 일을 선택하지는 못했다는 후회가 종종 든다. 퇴근 후 글을 쓰며 살겠다며 청춘을 바쳐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 주인공처럼.


그러나 진짜 삶은 그 다음에 온다. 몸을 던져 '선언'에 동참한 세연과 친구들은 '시작'하는 지점을 '절정'이라고 오해했다. 진정 위대한 선언은 사회의 일원이 되어 실제로 해나가는 것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일


나는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불안정'하게 보였다. 나 스스로도 '불안정'했고 또 그런 삶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정된 직장'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두려웠다. 소설 속에서는 나와 같은 선택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이름 붙여 설명하는데 뜨끔했다. 그래도 그런 선택이 내 나름대로의 '선언'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여전히 자유롭다. 인생의 절정, 남들이 성공이라 부르는 순간을 맞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세연을 따라 '선언'에 동조한 친구들에게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완성된 사회가 인정하는' 인생의 절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이미 내던졌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나'는 마지막에 아마 그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사회를 전복시키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이라는 걸. 사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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