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곁에 오래오래
새벽 3시 반쯤 일이 끝났다. 잠깐 집에서 쉬고(잠도 안와) 오전 11시 즈음 출근해 최종 마무리 업무를 하고 오후 3시 즈음 퇴근했다. 오후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일어나자마자 오랜만에, 한 열흘 만에 근처에 사는 엄마집에 가려고 채비를 했다. 아는 동생이 준 터키쉬딜라이트 - 예쁘고 맛난 것 엄마도 맛보라고 작은 그릇에 나눠 담고, 어제 쓱에서 받은 홍시가 맛있어서 몇 개 챙기고, 집에서 내려먹을 커피도 갈고, 아침으로 먹을 식빵도 챙겨간다. 때마침 엄마한테 전화도 온다.
"지금 가려고." "응, 엄마 지금 김장해. " 김장을? 김장을 혼자해?" 오메.
집에 갔더니 반가워 난리난 우리 쌀이(반려견). 거실 바닥에는 절여놓은 배추가 무더기이고, 커다란 대야에 고춧가루를 막 담고 있던 엄마. "아니, 김장을 어떻게 혼자해?" 이렇게 소문도 안내고 김장하는 엄마가 어딨대. 우선 쌀이 배변부터 시켜주고 돌아와 나도 새 고무장갑을 꺼내 꼈다. 채칼이 없어서 무를 직접 썰어야 하는데 나한테 썰어달라는 소리를 못하는 엄마. "내가 썰게." "너도 힘든데." "아냐. 괜찮아."
최근에 독감까지 걸려서 이제 낫는 중인 엄마는 내가 없었으면 종일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김장하고를 반복했을 거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김장했는데 엄마가 꼴지라며 눈밑이 까매진 엄마가 양념을 버무린다.
"내년에는 이제 안 할래." "그래, 엄마 내년에는 이제 하지마." "요새는 사다 먹는 것도 맛있다더라." "응. 김장이 우리나라의 좋은 문화이긴 하지만 엄마들이 너무 힘들지. 더 시간이 지나면 김장 하는 것도 보기 힘들 것 같아." "그래. 다들 사다 먹고 하니." "응. 나도 뭐 만들어놔도 출장도 잦고 끝까지 못 먹고 버리게 돼. 김치야 이래저래 활용도가 높아서 다르긴 하지만."
엄마가 김장을 안 하는 날이나, 못하는 날이 오면 좀 슬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엄마 옆에서 조물조물, 배추에 석석 양념을 바른다. 이 양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엄마 손을 거쳐 나온 것들이다. 햇살 이불에 말린 고추가 들어갔고, 무도, 배추도 엄마가 텃밭에서 농사지은 거, 마늘도 손수 다 껍질 까서 빻은 거.. 다 합쳐서 버무리니 양념도 꽤나 무겁다. 한참을 김치를 만들던 엄마가 한숨 내뱉듯 한 마디를 한다.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
내년에 김장을 안 한다는 말이 속상함의 무게였구나. 엄마는 정말 낼 모레, 48시간 후 칠순인데, 하물며 딸인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데 칠순 생일을 목전에 둔 엄마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사무치게 들까?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았구나. 얼마나 더 살까? 삶은 얼마나 더 지속되는가... 그런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다른 일이야 차치하고 엄마로서 쓸모 없어지는 게 어쩌면 엄마는 젤 무서운가보다.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라는 말이 자식들에게 쓸모 없어짐에 대한 두려움 아니고 무어겠는가. 최근 새 책을 내고 EBS 강의를 한 강신주 철학자의 말이 생각나 엄마의 말이 속에서 메아리도 치지 못하게 잘라 말했다.
"엄마. 쓸모가 없어도 사랑하는 게 정말 사랑하는 거래. 딸이 돈을 못 벌어도 우리 딸 건강하니 나는 좋다. 하는 게 사랑이래. 엄마가 병들어도, 나이 들어도 우리 엄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다. 그런 게 정말 사랑이래. 쓸모가 없는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게 정말 좋아하는 거래. 쓸모가 없어져도 사랑할 줄 알아야 사람이고 사랑이래."
목울대가 뜨거워지려는 걸 참고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사랑이래. 사람이래. 집에 돌아와 엄마가 김치와 함께 챙겨준 무를 채썰어 무나물을 만들었다. 지난번보다 훨씬 맛있게 되었다. 자박자박 국물도 생긴 걸 보니 엄마가 무농사를 잘 지었다보다. 나는 손목이 시어서 무 써는 것도 힘들어하는 엄마 생각에 무나물을 그릇에 담아 다시 엄마 집으로 향했다. 방금 만든 무나물에 밥 한그릇을 금세 비우는 엄마. 잠깐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 딸이 된 것 같다.
사랑은... 그래.. 사랑은.. 누군가에게 절실한 쓸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이미 사랑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당신의 존재함이 쓸모다. 김치를 못 만드는 엄마도 나는 좋아. 돈을 못 버는 당신도 나는 좋아. 오래오래 곁에 있어줘. 쓸모 없는 모양이 되어도 사랑해.
p.s 그나저나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