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동생들이 들어오면 종이인형을 마구 헤집고 찢어 뜨렸어. 그래서동생들 못 들어오게 살짝 방문 고리를 걸곤 했어.
그래도 동생들이 들어오겠다고 징징거리면 엄마는 나에게 문을 열어 주라고 뭐라 하셨어. 하지만 내가 "엄마, 나 숙제해야 해."라고 하면 엄마도 그땐 문 잠그는 것을 허락하셨지. 몇 번이나 동생들이 내가 숙제한 것을 찢거나 연필로 찍찍 그어서 내가 울고불고했거든.
이렇게 공식적으로는 숙제하는 시간이 내게는 종이인형 그리는 시간이었고, 나는 널브러져 종이인형 그리고 자르는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즐겼어.
아, 혼자 있던 시간! 종이인형이 탄생하는 시간이었지.
1960년이었네.
종이인형은 양팔은 언제나 옆으로 쫘악 벌리고 있었고 나는 항상 자를 대고 팔과 다리를 그렸지. 눈은 왕방울만 하게 그려 얼굴의 반을 차지했고, 눈의 위 속눈썹은 이마까지 닿고 아래 속눈썹은 코밑까지 닿았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이 종이인형들은 그 당시 내 재산 목록 1호였어.
예전엔 '보루 박구'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누런 박스로 이 안에 칸을 나누어 인형 놓는 곳, 긴 드레스 놓는 곳, 짧은 치마 놓는 곳, 바지 놓는 곳, 구두 놓는 곳, 가방 놓는 곳, 가구 놓는 곳이 분류되어 있었지. 가구는 ㄷ자를 아래로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종이를 접어 만들면 침대가 되었고, 그 침대 위에이불과 요를 놓았어.
나의 재산 목록 1호인 '보루 박구' 속은 또 하나의 내 세상이었지. 나는 종이인형을 혼자서도 잘 갖고 놀았어. 두 개의 인형을 양 손에 잡고 이쪽 인형의 목소리도 냈다가, 저쪽 인형 목소리도 냈다가 나는 1인 2역이 아니라 1인 다역을 하였지. 목소리도 바꿔가며 말이야.
나는 인형의 옷들도 전부 만들었지. 색연필이 흔치 않아 거의 연필로만 그린 옷들이었어. 종이인형의 옷은 앞에만 가릴 수 있는 옷과 앞 뒤로 다 가려지는 두 종류의 옷이 있었어. 앞에만 보이는 옷은 다 그려 놓고 자를 때 어깨 부분을 뒤로 접을 수 있도록 남겨 놓고 자르면 되었지. 그러면 종이 인형에게 옷을 갖다 대고 어깨 부분만 뒤로 젖혀 넘기면 되었거든. 근데 이 옷은 앞은 예쁜데 좀 부끄럽지만 뒷모습은 적나라하게 홀라당 벗은 모습이었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앞은 고상해 보이지만 뒤는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중인격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뒷모습까지 가릴 수 있는 옷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그 위에 옷을 그리면 되었어. 인형의 옷을 자르고 나면 접힌 곳이 어깨 부분이 되었고, 머리를 넣을 수 있게 앞이나 뒤를 길게 칼집을 내주면 되었지.
동네 여자아이들은 내게 모두 종이인형을 그려 달라고 하였어. 나는 여자아이들모두에게 종이인형도 옷도 그려주었어. 친구들은 내가 그린 종이인형의 옷을 보고 따라 그렸고, 나처럼 '보루 박구'상자에 종이인형과 옷들을 넣어 놨지.우리들은 "오늘은 종이인형 놀이하자" 그러면 모두 집에 들어가서 '보루 박구'상자를 하나씩 들고 나왔어. 그리고 골목의 맨 끝집에 놓여 있는 평상 위나, 바로 앞집인 반장 할머니의 대문 앞에 시멘트로 되어 있는 공간으로 가서 놀았어. 그런데 주로 종이인형을 할 때에는 맨 끝집으로 가서 놀았지. 반장 할머니는 시끄럽다고 우리를 내쫓을 때가 많았거든.
종이인형 놀이만 하면 우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투가 고상하게 바뀌었어. "이래라. 저래라." 반말을 사용하던 우리들이 종이인형만 갖고 놀면 "네, 안녕하세요? 호호호 어디를 다녀오시나요? 호호호 " 하며 잡고 있던 종이인형의 손을 입 까이에 갖다 대며 웃었고, 그러면 "호호호 시장에 다녀온답니다. 호호호" 하며 존댓말을 사용했어. "잠시 옷 갈아입고 올게요. 호호호" 하곤 또 옷을 갈아입고 왔지. 긴 드레스 입으면 춤추는 파티를 갔고, 파티만 가면 종이인형들은 춤을 추었어. 아마 신데렐라의 영향을 받아서였을 거야.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는 종이인형을 잡고 뱅그르르 돌곤 했지.
나의 '보루 박구'는 종이인형과 종이 인형의 옷으로 가득 차있었어. 새로 만든 종이인형도 있었지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인형들도 있었어. 나는 그런 인형도 하나도 버리질 않았지. 떨어진 목도 모두 종이를 덧대어 밥풀로 붙여 놓았거든. 그땐 지금 같은 매끄러운 풀이 없었어. 그래서 나의 인형들은 거의 목에 혹이 나 있었어. 밥풀로 덧대고, 덧대서 말이야. 목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도 찢어지면 밥풀로 붙여 주었지. 그래서 팔도 혹이 나 있었고, 다리도 혹이 나 있었어. 나중엔 종이인형들을 하도 갖고 놀아 흐물흐물 순두부 같아져도, 아무리 새 종이인형을 그려도 나는 부상당한 종이인형들을 버리지 못했지.
부상당한 종이인형들과는 병원놀이를 했어. 의사 인형이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부상당한 인형들은 " 목이 아파요." "다리가 아파요." 하고 대답했지. 그럼 "네. 고쳐드리겠습니다." 하며 밥풀 가져다 붙여주는 병원 놀이를 하면 되었어.
4학년 봄에 학교 갔다 오자 마자 종이인형 '보루 박구' 상자를 들고나가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친구들은 집까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나는 더 애가 타서 방 전체를 뒤졌지만 종이인형 상자를 찾을 수가 없었어.
나는 엄마에게 물었지.
"엄마, 종이인형 상자 못 봤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엄마는
"그 귀신 따개비 같은 거, 엄마가 불 아궁이 속에 쳐 넣었다."
엄마는 너무나 당당하게 내게 가재 눈을 흘기며 말씀을 하셨고, 나는 하늘이 노래져서 방방 뛰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