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릭, 꽈리릭

골목 너머 기억

by 빈창숙

꽈리


나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아주 커다랗고 투박한 항아리야. 이 항아리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 항아리 속엔 예전 어머니들이 곡식 넣어 두고 한 바가지씩 퍼내 밥을 짓듯이 나도 한 바가지 추억의 곡식을 꺼내 밥을 짓고 있어. 어릴 때 놀던 60년 전의 기억의 밥을.


내 어릴 적 우리 집 옆 빈 공터엔 이름 모를 꽃이 많이 피어 있었지. 누가 가꾸고 심지 않아도 이름 모르는 꽃들은 계절 따라 피고 지었어. 겨울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다 타버린 연탄재를 내다 버렸지만 물은 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빈 공터는 개의치 않고 봄이면 서로 시샘이라도 하듯이 잎이 나고 꽃을 피웠지. 자연의 섭리는 정말 대단해.

소꿉놀이에 양식이 되는 까마중, 쌀나무라고 불렀던 하얗게 조롱조롱 달린 쌀밥 열매는 지천으로 있었어. 깨진 빨간 벽돌은 돌멩이로 짓 찧으면 고춧가루가 되었고, 널린 풀들로 김치를 만들었지. 그 모든 맛난 것들 역시 병뚜껑을 돌멩이로 콩콩 눌러 만든 접시에 담으면 잘 차려진 밥상이 되었어. 엄마, 아버지 흉내를 내며 "여보, 당신"을 불러대면서 말이야. 그 시절은 언제나 까르르 거렸고, 친구와 싸우고 헤어져도 그다음 날이면 싸운 것이 생각도 나지 않았지.


나는 소꿉놀이도 좋아했지만, 꽈리를 만드는 것도 아주 좋아했단다. 주황색의 꽈리는 동그랗고 탱글탱글했으며 달짝지근했고, 씨앗이 설렁설렁 씹히는 게 자꾸 쯥쯥 빨아먹게 만들었어. 육각 보석함 속에 있는 꽈리의 잎을 하나씩 잘라 벗기고 제쳐 잡고는, 살그머니 이쪽저쪽으로 비틀어 대면 주황빛 동그란 속살이 한꺼번에 쭈욱 나와. 그러나 이런 일은 매번 일어나지는 않아. 꽈리를 달래고 얼러야 하는 시간 속에 경건함까지도 있어야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거든.

보통은 잎을 양옆으로 살짝 비틀기도 하고 앞 뒤로 꺾기도 하여 꽈리만 살짝궁 떼어내도 성공인걸. 꽈리를 만드는 시간엔 그 시끄럽던 이이들의 입을 모두 다물게 했단다. 아마도 꽈리를 만들 때가 제일 조용한 시간이었을 거야. 너무 집중하느라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지.


동그란 꽈리의 배꼽과도 같은 막힌 구멍을 헝클어진 머리에 삐죽 나와 있던 머리핀이나 아주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살금살금 파내고 속살을 홀 가닥 먹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꽈리가 만들어졌어. 속을 다 내준 꽈리는 동그란 모양으로 입속에 들어왔고 동글동글 굴려 바람을 넣은 뒤 아랫입술에 꽈리의 구멍을 대고 지그시 윗니로 누르면 꽈리는 꽈리릭 노래를 불렀지.

그러면,

가슴을 펴고

입술을 쭈욱 내밀고

눈은 꽈리처럼 동그랗게 뜨고

새가 된 것처럼 꽈리릭 불었단다.


마치 새가 된 것처럼.

펜화 꽈리 by 빈창숙


그런데 이 꽈리는 아무리 조심해서 불어도 금세 찢어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면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1원만 달라고 치마 잡고 생떼를 쓰면, 엄마보다 먼저 할머니께서 몸빼바지 속에 넣어둔 회색 똑딱 지갑에서 1원을 주시는 거야. 얼른 문방구로 달려가 고무로 된 동그란 꽈리를 사 갖고 입속에 넣어 세게 불면서 집에 오면 엄마는 시끄럽다 하셨지만 나는 멈추질 않았지.


고무 꽈리는 정말 예뻤어. 동그란 것이 바람도 잘 들어가고 찢어지지도 않고, 게다가 무지개 색깔도 있었고 무늬가 있는 것도 있었거든. 어찌나 그 꽈리가 이쁜지 다 탐이 났지. 종류별로 다 갖고 싶어서 문방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꽈리만 보고 있었어.


근데, 2학년인가 3학년 때인가 나하고 동갑인 앞집 아이가 무지개 빛깔의 꽈리를 세 개인가 네 개인가를 갖고 자랑을 하는데, 그 길로 엄마한테 달려가서 그냥 울었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도 말도 못 하고 그냥 울기만 했지. 저녁밥도 안 먹고, 배는 고팠지만 무지개 꽈리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해서 밥이 안 넘어간 거야. 그 일이 처음으로 단식투쟁을 한 거였나 봐


할머니 곁에 누워 잠을 자려다가 "할머니, 앞집 아이가 고무 꽈리를 많이 갖고 있는데, 나도 갖고 싶어." 말만 하려 했는데 내 눈에선 금방 눈물이 쏟아지고 나는 목이 막혀 더 이상 말을 못 했지. 할머니는 "그랴! 밥을 먹어야 사주지!" 하시며, 우리들에게 하나씩 돌아오지도 않는 귀한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얹고 간장 넣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밥 한 대접을 갖고 오셨어. 그 밥이 어찌나 맛이 있던지 싹싹 다 먹고 잤지. 제일 맛있는 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때 먹었던 간장 달걀 프라이 밥이라고 얘기해. 다음 날 할머니께선 엄마한텐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셨고, 나는 고무 꽈리를 세 개나 의기양양하게 사 왔어. 친구에게 나 또한 자랑을 하고 색깔별로 다 불어 본 뒤 한 개만 꺼내 놓고 나머지는 아까워 엄마 자투리 천에 싸서 몰래 감추어 놨어. 살짝 열어보고, 혼자만 흐뭇해하며.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투리 천을 펴보니 그 꽈리는 서로 찐득찐득하게 붙어서 녹아 있는 게 아니겠어? 어째 이런 일이, 아끼고, 아끼던 고무 꽈리는 딱 한 번, 아니 두 번쯤 밖에 안 불었는데 말이야. 나는 또 울어버렸지. 너무나 속상하고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할머니께선 더운 날씨에 고무 꽈리에 바람도 안 통하고 침이 묻어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녹아 눌어붙어 버리다니. 그 이후론 꽈리를 불고 나서는 꼭 물로 헹구고 뒤집어서도 말려 놓았어. 그리고 동생들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놓았지. 그때 꽈리처럼 사탕 먹고 물로라도 헹구어 주었더라면 임플란트는 안 했을텐데...


펜화, 꽈리 by 빈창숙


육각 보석함 속에 꽈리는

새의 날개 짓.


헝클어진 머리에

삐죽 나온 핀으로

쯥쯥 파내 먹으면


속살은 달짝지근

씨앗은 설렁설렁.


아랫입술에 올려 바람 넣어

윗니로 지그시 누르면

꽈리릭 꽈리릭

꽈리 소리는

바람을 가르는 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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