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글을 읽고
흰 종이컵에 담긴 물은 나의 물이다.
흰 것들로 물들어 버렸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첫눈이었지만 아주 많이 내렸다.
그 눈으로 눈사람을 누군가 만들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듬성듬성 그날의 흰 눈은 없어져 가고 있다.
거의 다 없어졌고 응달이나 숲속 깊숙한 곳에 가야 있을 것이다.
등산 겸 산책으로 산에 간 적이 오래되었다.
올라가 봐야 알 수 있지만 눈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고 깊숙한 곳에만 흰 눈은 얼어 있을 것이다.
이런 발상 자체가 나에게는 머리를 하얗게 만들 정도로 신선했다.
이렇게 흰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야기는 흰 것들로 채워졌다.
나 그리고 그녀, 모든 흰 것들이 책을 수놓았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엄격한 드레스의 규정이 없었더라면 흰 드레스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작가의 눈은 기쁨과 알지 못할 걱정이 숨겨져 있어 보였다.
‘흰’을 읽어서 그런지 흰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흰색 자동차, 흰머리, 흰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책 속에는 흰 것들을 찬양하는 듯했다.
왜 흰 것들을 정리해서 책을 쓴 것일까.
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인가 슬픔인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의미로서 글을 썼을 것이다.
흰 것은 종이고 검은색은 글씨인 시험지 같은 책이다.
도통 무엇을 말하기 위한 글인지 맞히기 힘들지만 ‘흰’은 어렵지만 풀고 싶은 책이다.
몇 번을 다시 읽어야 할지 모르지만, 흰 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은 책이다.
흰 것 중에 ‘진눈깨비’를 보자.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컹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컹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하고 엮으면 소설이 되는 신기하고도 참신한 책이다.
진눈깨비를 일 년에 한 번은 본다.
책 속에 우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무엇도 아닌 진눈깨비를 대면하는 내 느낌은 책처럼 이렇지 않았다.
감각적으로는 그냥 없어지는 하찮은 비듬 같다는 생각 정도였는데 심오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린다.
움켜쥐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는 일 년의 막바지이다.
이맘때 느낌은 허탈감과 희망을 동시에 품게 만든다.
오히려 12월은 나에게는 11월보다 나은 계절이다.
가을이 끝나는 11월이 더 춥고 가슴이 시리고 우울감이 든다.
확실하게 추운 것이 더 사람을 적응하게 만든다.
이것은 포기이자 수긍이다.
미루고 싶다고 해도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일들을 습관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것쯤 하나 생겼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생겨버렸다.
나에게는 다행인 셈이다.
점심 전에 25분 근력운동 하기, 걸어서 출퇴근하기, 책 읽기 등이 있다.
매일 반주하는 습관도 생길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미 시간은 흘러서 겨울까지 도달했다.
기억력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더듬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눈이 내린 차가운 겨울이었고 탯줄을 잘랐고 태어났지만 죽었고,
가족의 이야기이고 이국의 땅에서의 풍경이었다는 것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둠이 생각났고, 가로등과 바람이 생각났다.
불행하지만 계속되는 불행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언가 희망을 노래하는 느낌이다.
자꾸 되뇌어지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노벨문학상의 선정 이유이다.
참 약해 보이는 한강의 체구에서 나오는 글의 힘은 너무나 강하다.
글은 칼보다 강하긴 강한가 보다.
가장 강한 사람이 작가 한강이다.
한동안은 한강의 책을 읽을 것이다.
빠져들게 하는 힘이 뭐라고 설명이 안 된다.
모든 흰 것들의 정의를 내린 책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 속에 ‘손수건’을 흔들어보자.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 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아!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 버렸다.
떨어지는 손수건이 공기의 기류를 타고 느릿하게 떨어지는 것이 마치 혼이라니...
귀신 든 사람처럼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보는 눈은 예리하지만 아름답고 쓰는 손은 날렵하지만, 무게가 있는 문장은 흉내를 못 내겠다.
도핑테스트라도 해야 할 만큼 엄청난 괴력을 갖고 있다.
칭찬 일색으로 쓸 마음은 없다.
그냥 좋고 멋있고 그렇다.
마르지 않았으면 떨어질 때 그런 동작이 나오지 않았겠지...
손수건은 빨래하기 전 무엇이 묻어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누구의 것인지도 생각해 본다.
제대로 알고 있었더라면 알 수 있을까.
말이 필요한가.
그냥 손수건이 떨어진 것이다.
하얀 손수건이 말이다.
관찰력과 감성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책 속이 ‘당의정’도 소개한다.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이렇게 알약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논할 수 있다.
힘듦을 아는 작가임이 틀림없다.
나 또한 비누를 보면서 인생이 비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향과 거품이 진하고 풍부하게 많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라지고 많이 비비지 않으면 거품조차 나지 않는 것이 꼭 인생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몇 개의 새 비누가 사는 동안 쓰이고 버려지는지 처량한 생각을 욕실에서 주저앉아 비누를 거품이 날 때까지 비비고 있었다.
겉에만 달게 만든 사탕 같은 약이지만 속은 쓰디쓰다.
겉과 속, 폭력과 비폭력, 흰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존재한다.
마치 싸우기라도 하듯이 쌍을 이룬다.
흰 것들이 말해주는 순백의 느낌과 자유와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인생을 알아가고 삶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 행복과 희망이 존재한다.
광주 사태를 말하고 4.3 사건을 다룬 작품도 잔인함과 폭력이 난무하지만 무언가 희망이 존재한다.
글씨가 흰 여백을 채워가면 책은 완성된다.
채워가는 동안 온갖 고통과 번민이 스쳐 가고 각고의 노력을 쏟아붓게 된다.
창작의 고통으로 작가의 눈은 이미 퀭하다.
책 속의 ‘흰나비’를 소개한다.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들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 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한강의 책은 머리가 아팠다가 해소되는 느낌을 준다.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깊이 생각하고 곱씹어도 상관없고 느낀 대로 가도 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힘든 책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읽다 보면 다시 새 책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마법을 부린다. 두 번을 읽은 책은 없다.
또다시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재밌지는 않겠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다.
알아내야 한다.
접근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쓰레기라고 치부해도 상관없다.
한강의 모든 작품이 예술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한 번 더 노벨상을 받아도 좋을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오히려 느낌을 적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무래도 더 힘든 것은 당연하고 만든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수상이 확정되고 한강의 열풍이 불었다.
첫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고 하얀 세상이 사그라질 때쯤 혼란스러운 정국에 작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강 작가는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124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브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 문학상 증서와 메달을 받았다.
한강은 역대 121번째 이자 여성으로는 18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아시아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지난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 이후 12년 만이다.
흰 것에 집중하니까 눈이 흰 것에만 간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빙의된 기분처럼 말이다.
문학의 위력을 실감하기만 하면 되는데 게을러진다.
겨울은 시리고, 춥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계절이 확실하다.
아마도 이렇게 12월은 쓸쓸히 지나갈 것이다.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
운동을 좀 했더니 팔이 뻐근하다.
흰 것이 없다면 아마 모두가 미쳐버릴 것이다.
흰 것은 우리에게 여백과 쉼을 가져다준다.
채워 넣고 싶은 마음도 는다.
흰죽이 있었던 것 같다.
책 속에 말이다.
흰 우유가 갑자기 먹고 싶어진다.
배탈을 걱정해야 하지만 더러운 위장을 코팅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작가는 술을 하는지 모르겠다.
같이 술 한잔하고 싶다.
가장 기분 좋은 흰색의 운동화, 흰색 속옷, 흰색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
색 중의 색이 흰색이다.
나는 그렇게 흰색 자동차를 몰고 더럽혀진 차를 세차한다.
검은색 휴지는 없다.
색을 확인할 수 없어서이다.
그 색은 피와 똥을 비롯한 인간의 것이다.
검은 것들로 채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순수함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왜 흰 것들을 나열했을까.
나열하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기타의 흰 것들이 지배한다.
흉내를 내보려 한다.
흰 것 중 하나를 택해서 말이다.
재밌겠지만 힘들다.
포기해 버린다.
아무나 이렇게 쓰지 못하기 때문에 작가를 숭배한다.
쓰는 것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이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내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있다는 것은 공부가 안되었다는 증거이다.
이해를 못 하고 그냥 넘어가는 버릇은 고쳐야 한다.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얼마나 팠길래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일까.
어릴 적 환경과 유전자를 받았을 것이다.
배워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단순하게 끝나버리는 문장 자체가 싫어진다.
하나를 쓰고 나면 위안이 된다.
작업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나이테와 같이 새겨진다.
완성의 기쁨도 한몫할 것이고 따라오는 인세도 한몫할 것이다.
어렵게 쓰지 않으려고 해도 쓰면 쓸수록 힘들어진다.
욕을 바가지로 받아야 한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목적이 없는 독서를 하고 있다.
정독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읽어야 한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읽고 쓰려니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나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읽은 것을 써보자고 다짐했던 나의 약속을 아직 지키고 있는 나를 본다.
달라진 것은 없다.
목표는 분명하다.
채우는 게 목표이다.
그러나 크나큰 발전이다.
책 한번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금씩 꾸준히 하다 보면 목표에 도달하리라 믿는다.
신경을 온통 써야 한다.
흰 것을 만들어낸 한강 작가를 보고 싶다.
오늘은 술을 좀 먹고 싶다.
흰색의 막걸리와 흰색의 동치미가 어울린다.
흰색의 오징어숙회도 곁들이면 좋을 것 같다.
흰 것들로 건하게 취하고 싶다.
흰 것들로만 나의 속을 채우고 싶다.
흰 것을 토하고 싶다.
흰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