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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준비 완료

가을 안녕

by 배추흰나비

11월 마지막 주.

우리 삼 남매는 엄마의 기일을 맞아 성묘를 하고 주변 맛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제사를 없앤 건 잘한 일이다 하면서도 괜히 섭섭하고 쓸쓸하고 맘이 안 좋아서 며칠 소화불량과 불면에 시달렸는데,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겁게 웃고 떠들며 남이 해 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니, 이게 행복이다 싶었다.


우리가 웃고 떠드는 사이에 절임배추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성묘를 가기 전 양념을 미리 다 해놨었다. 20킬로 3박스. 사람이 여섯이었다. 후딱 김장을 다 마치고 다리를 펴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배달된 수육과 치킨과 족발을 먹었다. 먹으면서 또 나는 살짝 미안했다. 내가 할걸. 지난주 혼자 했던 김장의 악몽 때문에 시켜 먹자 한 건데 수육 그까짓 거 뭐 대충 물에 고기랑 이것저것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걸 괜히 시켜 먹자고 했나 하다가 동생들이 집으로 가고 나서 기름기 가득한 도마와 접시를 닦지 않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인가 싶도록 편하고 좋았다.


나는 늘 내가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게 이렇게 고루할 수가 없다. 김장은 꼭 해야 하고, 집에 온 손님에게는 내가 밥상을 차려 먹여야 하는 것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내가 즐겁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김장을 하고 다음날, 마당을 정리했던 쓰레기를 큰 쓰레기봉투에 세 개에 담아서 버리고, 화분을 정리하여 집안에 들여놨다. 여름 내내 마당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수국은 종이 박스로 감싸고 비닐을 둘둘 둘렀다. 이 정도면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12월이 되었고, 나는 계약종료로 백수가 되었으며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또 다른 나의 성찰이 시간이다. 그림과 글과 함께 하는 겨울을 보내려 한다. 모두 건강히 겨울을 견디어 내시길..


여담이지만,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참 '시'자는 다르긴 다르다. 내가 이석증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했을 때 시누들은 '나도 이석증으로 고생했어.', '나는 입원도 했었어.'뭐 이러면서 나의 이석증을 우습게 치부했더랬다. 아니, '어머나,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었어. 고생했겠네.'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래 그런 분들이지.. 하다가도 문득문득 서운하다.


내 동생들은 나 고생한다고 여동생은 밥값과 고깃값을 내고, 남동생네는 '흑염소 진액'을 사들고 왔다. 아프지 말라고, 꼭 다 먹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동생들이 걱정해 주어서 겨울이 더 든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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