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피가 고여있네요."
임신 6주 차, 심장소리를 확인하러 산부인과에 갔다. 초음파를 보면서 이런 일이 흔하다는 듯 의사 선생님이 건조하게 말했다. "배아가 1/3 가량 떨어져 있어서 유산 가능성이 높아요" 아이러니하게 기계음이 섞인 심장소리는 두근두근 우렁차게 들렸다. 얼떨떨하고 신기하면서도 불안함이 스몄다. 어쩐지, 생리를 하지 않는데도 아랫배가 우리하게 아프고 으슬으슬 을씨년스러운 상태가 오래가더라니.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옷을 여미고 병원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언제든 유산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갑작스러운 임신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걱정이 한 덩이씩 불어났다. 유산하면 여성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인터넷과 책을 뒤적였다. 뾰족한 답은 없었다. 아랫배가 서늘한 느낌에 혹여나 피가 나왔을까 조심하며 화장실에 갔다. 사실 유산으로 인해 수술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산부인과는 자궁경부암 검사를 하러 겨우겨우 가는 곳이었다. 늘 긴장되고 낯설었다. 임신 확인을 위해 질 초음파를 할 때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힘 푸세요"라는 의사 선생님 말에 작은 소리로 알겠다며 대답했다. 질은 귓구멍, 콧구멍과 같은 구멍이라고 되뇌었으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산이라니. 질 초음파의 몇 배에 해당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파트너는 내 걱정을 가볍게 안심시키는 편이었다. "정말 안 좋았으면 병원에서 6주 뒤에 오라고 했겠어?" 그것도 그래. 산부인과에서는 6주 검진 이후 12주 차에 오라고 했다. 만약 피가 나거나 통증이 심하면 병원에 와야 한다고 덧붙였으니 몸을 살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함께 사는 자그마한 생명체에게 이름은 붙이고 싶었다. 마침 친구에게 호랑이가 그려진 신생아용 모자와 배넷저고리를 선물 받았다.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으면서 심장소리를 확인하던 때와 비슷하게 설렜다. 파트너에게 말했다. "2022년이 호랑이띠인가 봐. 호랑이 기운 가득하게 태명을 어흥이로 지을까? 어흥이 어때?" 그가 어흥, 어흥을 반복해서 발음했다. 그의 어흥 소리가 듣기 좋았다. 태명이 생기자 한결 친숙해졌다. 내 뱃속에 씨앗만 한 어흥이가 꼬물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신기했다. 자기 전에 배를 문지르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호랑이 캐릭터만 보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엽서나 스티커로 판매하는 그림을 수집하는 버릇도 생겼다. 사무실 책상 위, 자주 사용하는 노트, 다이어리 등 보이는 곳곳에 호랑이 그림을 붙여놓았다. 임신했다는 실감이 안 날 때마다 상기시켜 줬다. 호랑이 기운이 가득하게, 어흥이가 건강하다면야 호랑이 보러 동물원에 갈 기세였다.
10주가 지나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그즈음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내 품에 안기는 꿈을 꿨다. 날씨 좋은 날 푸른 잔디가 가득한 곳에 앉아있는데 작고 하얀 강아지가 보였다. 살그머니 뒤꽁무니를 따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서서 내 품에 쏙 안겼다. 강아지의 보드라운 털이며 심장 뛰는 느낌이 생생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태몽이라는 걸 알았다. 강아지 같은 호랑이인가보다며 혼자 히히 웃었다. 온몸 구석구석 따뜻한 봄볕을 머금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12주 차, 산부인과에서 복부초음파를 했다. 복부초음파는 질초음파와 달리 쉽고 편안했다. 기계로 배를 문질문질 하니 아기집에 아이가 누워있는 형상이 나타났다. "태아 크기며, 심장박동 모두 정상범위예요" 다행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전보다 크고 단단하게 전해졌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작은 사람에게 고마웠다.
어흥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