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0주 차, 검진일이 아닌 날 산부인과에 갔다. 무슨 일로 왔냐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입덧이 없는 게 이상해서요" 내 말에 갸웃하더니 "입덧이 없는 게 문제인가요?" 반문했다. 말문이 막혔다. 부끄럽고 당황해서 어버버 하게 "아.. 문제가 아닌가요?" 되묻자, 간호사 선생님은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투로 "그럼요. 입덧이 없으면 좋은 거죠" 했다.
나는 임신을 하면 음식을 먹다가 "웩"하면서 화장실로 달려가는 일이 빈번할 거라 생각했다. TV를 보면 그렇게 임신을 알게 되니까. 엄마도 임신하고 물도 못 마실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특별히 땡기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를 맡고 울렁거리는 음식도 없었다. 임신 출산 관련 책과 인터넷에 주기별 증상으로 입덧, 먹덧을 설명하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일었다. 아이가 홀연히 사라진 건 아니겠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불어나 산부인과로 향했지만 의사 선생님은 만나지 못하고 12주 차 정기 검진일에 보자는 인사만 듣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허탈하면서 웃음이 났다.
사실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유산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그래도 배탈로 고생 중인데 연관이 있냐고 물었더니 의사 선생님은 "그건 내과에 가보세요. 장염일 수 있습니다" 말했다. 초기에 엽산을 먹으라기에 영양제를 복용하라는 책 내용이 생각나서 뭘 더 먹으면 좋을지 물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초기에 권하는 건 엽산입니다. 다른 영양제는 산모분이 알아서 판단하세요"라고. 사무적이고 딱딱한 반응에 괜한 걸 질문했나 무안할 정도였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이 화난 줄 알았다. 5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인 선생님은 늘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말투에 나도 절로 군기 바짝 든 학생처럼 "네!"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차갑거나 설명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선생님의 초음파 설명은 정확하고 자세했다. 산모가 알아야 할 정보, 이를테면 이 시기 정상적인 태아의 크기와 심박수를 알려주면서 어흥이의 크기와 심박수를 설명하는 편이었다. 선생님이 만들어준 분홍노트에 검사결과가 한번 더 적혀있었다. 마지막엔 질문 있냐고 덧붙였는데 듣다 보면 질문할 게 없어졌다. 진료 마지막은 나의 "없습니다!" 외침으로 마무리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사 결과를 명확히 전달하고 과잉진료를 하지 않는 산부인과 운영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원래 다녔던 산부인과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했다. 어디가 불편한지, 상태가 어떤지 자분자분 대화해서 좋았지만 자잘한 증상에 반응하며 온갖 약과 주사를 권했다. 병원만 갔다 오면 먹지 않는 약이 늘어났다. 질염 치료를 하러 갔다가 철분제를 사는 식이었다. 이번 산부인과는 통증이나 출혈 등 꼭 와야 하는 증상을 알려주고 4주 혹은 6주 뒤에 검진이 잡혔다.
임신이라는 몸의 거대한 변화를 처음 겪다 보니 책과 인터넷, 지인으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는다. 많은 걸 접할수록 몸의 변화를 이해하기는커녕 불안함이 가중된다. 이 즈음에 입덧이 있다던데, 변비와 치질이 생긴다는데. 왜 나는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끙끙대며 태아보험을 알아보다가 덮었다. 불안은 결국 소비로 연결된다.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유추하면서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병원에 질문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단단해졌다.
주기별 태아의 성장은 차근차근 이루어지지만 산모마다 몸의 변화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더라'는 알고 있되 나는 어떤지 살피면 그리 걱정할 게 없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상태로 임신 과정을 겪었다. 주변에서 임신하고 몸은 어떠냐는 질문에 "임신이 체질인가 봐요" 답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물론 모든 임산부가 나 같지는 않을 터. 수많은 경험담, 책과 인터넷 정보가 전부가 아니듯 내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새겼다.
보건소에서 임산부 배지와 엽산을 받았다. 배지를 손에 들자 메달을 받은 것만 같다. 내가 임산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