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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Jan 17. 2023

04. 순식간에 결혼식

어흥이 덕분에 이런 것도 해보나 싶은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결혼식이다.


봄볕이 따사롭고 화창한 5월, 남산이 보이는 양지바른 한옥마을에서 전통혼례를 했다. 어느 사대부 집이었을 단아한 한옥에 햇살을 가리는 하얀 천과 신부를 상징하는 빨간색, 신랑을 상징하는 파란색이 어우러졌다. 신랑이 돌담을 따라 걷고 신부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면서 식이 시작한다. 엄마가 그가 건넨 기러기를 받으면 내가 앉아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나가는 순서다. 문이 열리자 온갖 소리가 섞여 "꺄아아악" 함성이 공간을 메웠다. 큭큭큭 웃음이 나서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집중하세요. 멈추지 말고 걸으세요" 도와주시는 분이 속삭였다. 갓을 쓴 주례 할아버지 외침에 따라 맞절을 했다. 예전에 만난 학생들의 축가와 미리 섭외한 퓨전 국악팀의 공연을 들었다.


한바탕 정신없지만 날씨만큼이나 맑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면서 틈틈이 생각했다. '어흥이가 선물해 준 시간이네. 덕분에 나는 정말 행복해. 고마워, 어흥아'  


그동안 결혼식을 미룬 건 굳이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집을 위해 혼인신고를 했던 터라 법적으로 가족에 속했지만 아내와 남편, 며느리와 사위로 존재하는 가족에서 벗어나 있었다. 파트너는 비혼에 가까웠다. "우리가 좋아서 연애하는 것과 서로의 친척까지 만나며 가정을 꾸리는 건 다른 것 같아. 특히 여성은 며느리로 요구받는 역할이 많아지니까" 그는 결혼을 하면 여성에게 부여되는 역할의 굴레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고로 어른의 부재가 드러나는 결혼식이 슬플 것 같다고 했다. 나라도 그렇겠다 싶었다. 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결혼식의 로망이 있었지만 그다음은 그려지지 않았다. 엄마는 종종 말했다. "만약 내가 결혼을 안 했으면 조금 더 자유롭게 살지 않았을까" 지금을 후회하는 건 아니라면서도 내 선택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아빠는 일반적이지 않다고 걱정하면서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라며 묵묵히 지켜봤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를 가까운 사람들만 알 뿐, 누군가 내게 결혼했냐고 물으면 머뭇거리다 답했다. "결혼은 했지만 식은 하지 않았어요"라고. 코로나가 퍼지면서 모임 자체가 취소되는 상황이라 결혼식은 꿈도 꾸지 못 했다. 가끔 나와 파트너는 우리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글로 풀어서 책을 내볼까, 갤러리를 빌려서 전시를 해볼까. 선뜻 추진할 동력은 없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살 수는 있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하나하나 설명하려니 지끈댔다. 결혼식을 하는 게 우리 관계를 알릴 겸 아이 소식을 전할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근사한 곳에서 '딴따다다' 노래에 맞춰 등장하는 식은 원치 않았다. 이걸 하면 저걸 하도록 엮여 있는 거대한 산업 같았다. 소규모 웨딩은 품이 들었다. 공간 대관에 세팅, 드레스와 화장, 프로그램 등을 고르려니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럼 뭐가 좋을까. 결혼식이라는 형식을 갖추되 품이 적게 들고, 멀리서 축하하러 온 분들이 축제에 참여했다는 느낌이 들만한 그런 식. 파트너는 전통혼례를 제안했다.  


전통혼례로 결정하자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서울에서 전통혼례할 공간을 알아보고 두세 곳을 둘러본 뒤 바로 예약했다. 남산골 한옥마을이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데다 고즈넉하고 볕이 잘 들어 마음에 들었다. 문화재 구역이라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과 실외 진행이라 날씨 제약이 있는 점을 빼면 만족스러웠다.


주변에서 결혼식 준비로 바쁘냐고 묻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파트너가 청첩장을 디자인하고 나는 한복집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한복을 맞췄다. 나보다  친구들이 결혼 준비에 진심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웨딩사진을 찍어주고 결혼식 답례품을 준비했다. 결혼식   전부터 친구들 대화방에 수다가 오고 갔다. "재은아, 전통혼례 하는 곳에 현수막 걸어도 되는지 물어봐주라" 도대체  하려고 그러지. 문화재라 어려울  같다는 답변을 전했더니 무척 아쉬워하면서 현수막 디자인을 보여줬다.  얼굴을 크게 넣고 '이재은,  가라' 식의 문구였다. 다행(?)이었다. 친구들 덕분에 답례품을 준비할 수 있었다.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 쌓였다.

 

결혼식 당일, 나도 신부화장이란 걸 했다. 머리를 올리고 붙이고 아이라인과 립스틱까지. 내가 아닌 모습이 낯설고 요상했다(평소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 나를 보고 웃자 덩달아 웃었다. 너도나도 "신부가 신랑을 너무 좋아하네, 신부가 이렇게 웃는 결혼식은 처음이네" 말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내가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다시는 절대 신부화장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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