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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Mar 23. 2023

10. 녀석을 만난 날

"유도분만을 하면 무통주사가 가능한가요?"

예정일이 지난 지 열흘 째, 유도분만이냐 제왕절개냐 하나를 결정할 일만 남았다. 출산의 고통은 무섭지만 마취하는 수술은 더 싫어서 유도분만을 택했다. 혹시나 덜 아픈 방법이 있을까. 내 질문에 선생님은 건조하게 말했다. "자동차로 치면 유도분만은 엑셀이고 무통주사는 브레이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둘을 같이 쓰면 어떻게 되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삼켰다. 오롯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구나. 유도분만 실패확률이 높다고 해서 더욱 더 긴장됐다.


출산할 때 산모가 아프다고 하지만 태아가 자궁을 빠져나오면서 겪는 건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그마한 녀석이 고생할 거라 생각하니 짠했다. 자기 전에 배를 쓸었다. "어흥아, 드디어 내일 만나는구나. 우리 힘을 합쳐 잘해보자. 나도 힘낼게!"


오전 10시에 입원, 얼떨결에 옷을 갈아입고 눕자 바로 촉진제를 맞기 시작했다. 남편과 수다를 떨다가 음악을 들으며 '별 거 없네' 하길 1시간. 갑자기, 순식간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도로 한복판에 누운 나를 차들이 꽈아악 밟고 지나가는 느낌. 이러다 질식해서 죽겠다 싶은 고통이었다. 악 소리도 나지 않는 통증은 처음이라 호흡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견디기 바빴다. 벽 가까이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식은땀을 흘리는데 불현듯 동해바다가 떠올랐다. 마치 통증이 파도가 넘실넘실 해안가로 밀려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리듬이 있었다. 내가 바다가 된 것 같았다.   


화물트럭이며 대형버스가 연달아 배를 밟고 지나가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러다 바다에 꼬르르 잠길 것 같았다.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에 내진과 태동검사를 확인한 의사 선생님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늘 건조함을 유지하던 모습과 상반된 목소리였다. "아이가 위험하니 분만합시다. 분만실로 옮겨요, 어서" 분만실까지 5미터 남짓한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서 걷다가도 통증으로 멈춰 섰다. 분만실은 5평 남짓한 크기로 한쪽벽에는 수술도구들이 보였다. 분만대에 눕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 이상 못 견디겠으니 수술을 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그러자 눈빛이 다부진 간호사 선생님이 내 어깨를 잡았다. "산모님, 지금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여기서 대형병원 가면 큰일이야. 산모도 애도 위험해. 정신 차려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꽤 다급한 상황이라고 인식하면서 천장에 시선을 뒀다. 손잡이를 잡고 다리를 어떻게 하라는 설명을 따라 하는 와중에도 쥐어짜는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선생님.. 저 너무 아파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원래 아픈 거라고, 뭐라 뭐라 설명하는 말이 귓등에도 다가오지 않았다.


"통증이 있을 때 끙하고 힘을 주세요" 그렇게 끙하길 몇 번, 중간에 자꾸 힘이 풀렸다. 힘을 주다 보면 숨이 안 쉬어져서 머리가 아팠다. 더는 못하겠다 싶을 무렵, 간호사 선생님이며 의사 선생님이 큰소리로 외쳤다. "엄마! 아이만 생각해요!" 흐릿해지던 시야가 분명해졌다. '엄마, 아이' 단어가 귀에 박혔다. 그래, 아이가 위험하다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죽더라도 낳자. 다시 한번 "끄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응-"했다. 마침내 머리가 보인다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손을 잡았다. "어어! 여기서도 머리가 보여! 조금만 더 힘을 내!" 파도가 밀려가듯 녀석의 머리가 쑤욱 빠졌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다시 힘을 주니 와라라라 하면서 몸통이 빠져나갔다.


끝났다는 기쁨에 눈물대신 웃음이 났다. 따뜻하고 물컹거리는 존재가 배 위에 올라왔다. 미끄덩거리는 촉감이 낯설었다. 피가 묻고 태반이 묻어 꼬질꼬질하고 자그마한 녀석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울어제꼈다. 남편은 엉거주춤 서서 탯줄을 잘랐다. 배를 누르는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어지러웠다. 내가 출혈이 많은 편인 데다 지혈이 잘 안 된다고 했다. 분만실에 대기하면서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잔뜩 힘을 주느라 흘린 땀이 식어서 몸이 얼어붙었다. 아무리 이불과 남편의 겉옷을 덮어도 추웠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내가 또 애를 낳나 봐' 이를 갈았다. 


그래도 녀석을 만나 기쁘고 설렜다. 촉진제를 맞고 4시간 만에 해냈다는 성취감도 밀려왔다. 남편이 손을 꼭 쥐고 수고했다며 다독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녀석이 태어난 셈이다. 회복실로 가자 녀석도 곧 하얀 천에 둘둘 말려서 우리에게 왔다.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에 안도했다. 건강하게 만나서 다행이었다. 이 세상에 잘 왔어, 어흥아. 만나서 반가워.

역시 끝은 무슨 끝.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열 달 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은 찰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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