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어나 볼까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출산하고 지혈이 안 되어 한참 누워있었다. 계속 피가 나면 대형병원 갈 수 있다는 말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1시간 만에 돌아온 의사 선생님이 차분하게 물었다. 이제 병실로 가는구나 반가워서 몸을 일으키자 생각보다 무겁고 힘겨웠다. 발바닥이 땅에 닿으니 어지러움도 몰려왔다. 파트너에게 안기다시피 몸을 기댔다. 의사 선생님도 단단하게 내 팔을 잡았다. 자연분만은 출산 후 2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속 누워있고 싶었다. 회음부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대고 그 불이 내 몸을 다 태워버릴 것 같았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병실은 작았다. 3평 남짓에 산모용 침대와 작은 소파, 아이 침대, 그리고 TV와 화장대가 놓여있었다. 아이 침대가 없었다면 어느 작은 소도시의 모텔방 같기도 했다. 겨우 침대에 누워 숨을 골랐다. 때마침 밥을 먹으라면서, 침대를 세우고 자리에 앉는데 "왁" 소리 질렀다. 회음부에 붙은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이다. 뜨겁고 따갑고 욱신대고 죽겠어! 서서 먹을 수도, 앉아서 먹을 수도 없어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뗐다 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제일 먼저 미역국을 입에 넣으니 아이 낳을 때도 나지 않던 눈물이 났다. 내가 다시 태어난 듯 오늘을 기념하며 미역국을 먹는 것만 같았다. 울다 먹다, 엉덩이 뗐다 붙였다 정신이 없었지만 맛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고슬고슬한 밥은 달았고 미역국은 고소하면서 개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갓 태어난 어흥이가 간호사 선생님 품에 안겨 방으로 왔다. 산부인과 운영방침에 따라 모자동실이 시작된 것이다. 녀석은 내 손바닥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에 팔다리는 손가락처럼 가늘었다. 까무잡잡하고 꼬질꼬질하면서 뜨끈한 낯선 생명체였다. 간호사 선생님은 안는 법부터 먹이는 법, 기저귀 가는 법을 알려줬다. 나는 비몽사몽 상태로 듣는 둥 마는 둥 넘겨버렸다. 파트너는 본인의 역할을 이해한 듯 이럴 때 이렇게 하면 되냐고 질문하면서 간호사 선생님과 대화했다. 나는 파트너 품에 안겨서 자는 녀석을 보고 또 봤다. 내 배에 있던 어흥이가 맞니? 갑자기 녀석은 미간에 힘을 주더니 뻬에에엥 울었다.
녀석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녀석은 자거나 울었다. 녀석이 자면 자는 대로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숨죽이고 있다가 녀석이 자그마한 체구로 있는 힘껏 울면 나와 파트너는 혼이 빠졌다. 간호사 선생님이 분유를 갖다주면서 말했다. "배가 고픈지 보려면 아이 입 주변에 손가락을 대보세요. 내 손을 먹으려고 할 때 분유를 주시면 돼요." 녀석은 눈을 감은채 분유젖병을 꼴깍꼴깍 빨아댔다. 나도 밥을 먹고 기운이 생겨서, 파트너에게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다. 어흥이를 조심조심 받아 들었다.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허리와 엉덩이를 받쳤다. "반가워, 어흥아." 첫인사를 나눴다. 어흥이는 배가 부른 지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녀석은 2시간에 한 번씩 깼다. 초록색 물똥을 싸서 기저귀를 갈거나 분유를 먹였다. 나는 모유수유를 시도했다가 회음부가 따끔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어 금방 포기했다. 파트너는 밤낮없이 아이 울음에 반응하고, 이래도 저래도 울면 품에 안아서 작은 방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나와 같은 날 출산한 사람들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동이 트는 새벽, 옆 방과 옆옆 방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녀석이 깰까 봐 긴장하면서도 속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정말 수고가 많아요! 힘내요!' 얼굴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동료애가 싹텄다.
"준비 됐나요? 사진 찍겠습니다." 모자동실에서 2박 3일을 지내고 퇴원하는 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카메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와 파트너는 얼떨떨하게 방 한쪽 구석에 섰다. 사진엔 '산부인과 홈페이지에서 봤던 그 사진이다! 여기서 찍는 거였어' 모든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은 표정의 나, 초췌한 얼굴의 파트너 그리고 그의 품에 잠든 어흥이가 담겼다. 마침내 둘에서 셋이 된 첫 가족사진을 선물 받았다.
강렬했던 모자동실의 경험을 뒤로 한채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산후조리원에 간지 반나절 만에 집에 가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