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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Aug 08. 2023

13. 이름 짓기 워크숍

"그 이름은 발음이 어려운데? 입안에 ㅊ이 걸려." 

나는 남편과 어흥이 이름을 얘기하다가 싸울 뻔했다. 남편이 제안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내가 말했다. 그는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말이 없다가 다시 제안했다. '이름 짓기 워크숍'을 하자고. 그날 밤, 그가 집에서 포스트잇과 매직을 가지고 왔다. 포스트잇에 원하는 이름을 크게 적었다. 그는 3개, 나는 8개의 이름을 산후조리원 벽면에 붙였다. 11개의 이름들이 덩어리로 다가왔다. 

 

토론은 어떤 아이로 크면 좋을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나는 주변을 밝게 물들이는 존재가 되면 좋을 것 같아서 귀엽고 동글동글한 이름을 얘기한다면, 남편은 자신만의 무언가를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며 진중한 이름을 말했다. 나는 지금의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그는 이다음에 녀석이 불리게 될 이름을 짓는 것 같달까. 그게 그거 같은데 아니었다. 이름 짓기는 생각보다 첨예하고 치열했다. 어쩌면 스스로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는지도 몰랐다. 


서로 합의한 이름이 없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의 이름, 현상, 계절을 뜻하는 단어에 끌렸다. 특히 남편은 물을 무척 좋아해서 (그는 바다만 보면 뛰어드는 습성을 지녔다) 강이나 바다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이름을 생각했다. "여울, 어때?" 우스갯소리로 둘째가 생기면 '너울'로 짓자면서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뜻을 찾아보니 고민이 생겼다. 여울, 강이나 바다 따위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 뜻을 볼수록 어흥이 이름을 여울로 지었다가는 인생의 풍파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자연 현상으로 아이 이름을 지으면 좋겠는데. 그럼 윤슬(뜻: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어때?" 윤슬은 내 친구 이름이었다. 어흥이를 부를 때마다 친구가 생각날 거라고 말하자, 그는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면서 툴툴댔다. 그 또한 내가 제안한 이름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나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꽂혀있었다. 주인공 나희도를 보면서 기운을 받고 있었기에 주구장창 '희도'를 외쳤다. 그는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에 따라 아이 이름이 바뀔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희'가 들어가도록 변형해서 이름을 제안했다. "그럼 희주 어때?" 그는 자신의 지인 이름이라고 했다. "걔는 나한테 이미지가 안 좋아"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차라리 평범하고 흔한 이름이 나을 것 같은데. 연우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선연은 어때? 선연, 산뜻하고 밝다는 뜻 이래." 내가 선연, 선연 여러 번 입안에서 굴리다가 말했다. "근데 발음이 좀 어렵지 않아? 선연아, 선연아. 차라리 받침이 없는 서연이 좋겠어." 그가 한숨을 쉬는 것처럼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할까 싶어 목소리에 활기를 더했다. "은별이는 어때?" 그는 내가 지은 이름들이 마냥 귀엽다면서, 녀석이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 이름으로 불린다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는 자기가 제안한 이름으로 하자는 거야 뭐야 하는 짜증이 솟구쳤다. 


하루면 끝날 줄 알았던 워크숍은 일주일 간 이어졌다.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은 그 자리에 그렇게 붙어있었다. 우리는 사활을 건 것처럼 토론을 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며칠이라도 이름에 대해 얘기하지 말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 이름이 만약 '재은'이 아니고 '은별'이었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짐작하면서, 부모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갓 태어난 녀석의 이름을 짓는 일.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주말 아침,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남편과 수다를 떨다가 다시 이름 얘기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흥이 이름에 꼭 들어가면 좋겠는 단어가 있어?" 그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연"이라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제안한 선연, 초연 이름에는 '연'이란 단어가 들어갔다. "그럼 연이 들어가게 이름을 지어볼까?" 천장을 보면서 이런저런 조합을 얘기하는데 남편도 물었다. "너는 그런 단어가 있어?" 딱 생각나지 않아 망설이다가 "이? 내 성이기도 하고 가운데에 '이'가 들어간 이름이 예쁘더라." 그렇게 어흥이는 '이연'이 되었다.  


내가 오래 다니는 한의원 선생님에게 아이 이름을 알려드렸다. 이름이 정해지면 한자를 붙여주시겠다고, 선생님의 선물이었다. 배나무이  흐를 연 演. 스며들다, 펴다, 스며 흐르다, 통하다는 뜻을 가진 '연'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연아"하고 부르는 게 더 좋다. 연아, 이름을 입안에서 굴릴 때마다 졸졸 흐르는 냇물과 그 옆에 선 배나무가 떠오른다. 연아, 무엇이 되었든 흐르듯이 살아. 우리 그렇게 살자. 


주변 어른 중에 이름을 듣고 '이년'이라 놀릴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 이름을 다시 짓자니 그와 지난했던 토론 시간이 생각났다. 어후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렇게 놀리는 놈들이 있다면 '미친개가 짓네' 생각하게끔 강한 멘탈을, 비슷한 이유로 놀림받는 친구들을 지켜주는 단단함을 키울 수 있도록 건강하고 다정한 연이로 무럭무럭 자라나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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