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내가 다닌 여고에는 괴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여학생이 비만 오면 나온다는 꽤 큰 도서실도 있었다.
낡은 책이 가진 칙칙한 냄새가 입구부터 묵직하게 났다.
그 묵직한 음침함 때문에 귀신이 나오니마니 말이 돌았겠지만 집중하기엔 그만이었다.
명색이 문예부였으니 출입이 잦았고 덕분에 "책 좀 읽었는데~"란 소리도 들어보았다.
짧은 시집이나 로맨스 류보다 장편을 먼저 잡았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상하권을 쉬지않고 읽었다.
불같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한다하니 불륜과 이혼을 이해하지못해도 대문호의 섬세함을 감히 읽은 척 했나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나의 애장서다.
읽을 때마다 참 다르게 와 닿는다.
어떤 날은 너무 슬프고 혹은 너무 진지하고 혹은 작가가 진짜 천사와 교류한 게 아니었을까 부럽기까지 하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추운 러시아라면 있을법도 한 미카엘.
그 때도 오타쿠가 있었는데 대상은 만화였다. 웹툰 작가가 연봉 상위권을 잡은 요즘이나 당시에는
일본만화가 대세였고 그중 러시아배경의 "올훼스의 창'이란 책이 유명했다.
19세기 초 유럽청년들의 사랑, 귀족과 서민, 부르조와와 프롤레타리아란 낯선 명칭, 러시아 혁명, , 라스프틴, 왕후 자손의 혈우병 등을 담고 있는 내용인데 수업시간에 중요도에서 밀린 러시아 역사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독일 귀족 출신인 남장여자가 알렉세이란 이름의 러시아출신과의 사랑, 주인공남자는 항상 옳다.
완전 멋있다.
"알렉세이~~"
" 아나스 따시야~"
러시아가 낯선 만큼 이름도 신선하다. 이노무시키 저노무시키(사실 -시키는 -지방 사람,-출신이란 뜻이란다)
외에도 멋진 이름들이 많더라.
드미트리, 예카트리나, 빅크또르, 세르게이, 안톤....
소설과 만화뿐인가? 코마네치의 10점 만점 체조, 따놓은 금메달이었던 피겨스케이팅의 우아함은 하필이면
정서적으로 순수할 때 읽고 본 탓에 러시아, 구(舊) 소련은 "받는 것 없이 좋은" 그런 부류가 되었다.
(지금 회자되는 러시아 정치와 경제 그리고 김연아의 금메달을 훔친 것과 다름없는 소치올림픽은 별개로 하자)
그 때문인지 2년 전, 친구들이 여기 어때? 했을 때 바로 엄지 척을 한 곳이 러시아였고 시간관계상 가까운
블라디미르만 갔는데 또 가고 싶은 곳 넘버원이다.
일단 비행시간이 두 시간이라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가뿐하게 다닐 수 있다.
'독수리 전망대' 높은 건물, 미세먼지가 없어서 시야가 참 좋다.
겁나 맛있는 대게를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인형처럼 생긴 푸른 눈을 가진 미녀들을 보는 것도 포함이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는 또 어떤가?
가녀린 몸매에 애절한 표정의 백조가 왕자와 흑조를 바라보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숨 죽이면서 본다.
그거 안 본 사람은 말을 마라이다.
발레 공연을 보러 갈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드레스코드가 정장 차림이다.
국가적 예술에 대한 품위,품격이 남달라 보인다.
시골마을의 장터를 연상케 하는 광장시장도 재밌고 유익하다.
블랙홀마냥 어제 가고 오늘 가고 내일도 꼭 가자가 되는 그곳엔 방금 구운 빵에 수제 치즈,
연해주에서 잡은 듯한 생선들이 있다. 신기하게도 비린내가 나지않는다. 얼어있네.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만화 속 주인공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사회주의와 혁명이 과연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현실을 보면 답이 나온다.
레닌의 동상은 외롭게 서있는데 우리나라 기업이 마련했다는 광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아보자던 그들의 이념은 1인당 GDP가 유럽연합에서 제일 못 산다는 루마니아보다 낮다고 하니 경제 경쟁력을 따지자면 모두가 그냥저냥 사는 것 같다.
물가가 싼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정리되지않은 도로,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가는 버스, 택시 요금도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소통이 아주 아주 어렵다.
왜냐? 러시아말이니깐! 러시아 언어는 영어 같은 서구 언어와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근접한 나라들끼리 보이는 언어적 유사성을 못찾겠다.
흔히들 언어 난이도를 이렇게 구분한다.
시작이 어렵지 배우다 보면 쉽다 =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온다
시작은 쉬운데 갈수록 어렵다 =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온다
러시아어는 울고 들어가서 계속 운다에 속하니 얼마나 어려운 언어인가?
여고 때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는데
das das dem der der der dem der... 구구단처럼 무조건 외웠던 여성격 남성격 중성격, 모든 단어가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 요상한 게
러시아 언어에도 있다.
중국어는 한자로, 일어는 어릴 때 조금이라도 들어봤으니, 영어는 중학교 때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온 탓을
비교하니
러시아어는 생소하다. 너무 생소하다. 알파벳도 다르게 쓰고 다르게 읽는다.
그런 울고 들어갈 언어인 러시아어에 도전장을 냈다.
누가? 내가!
왜? 소통하고 싶으니깐!
누구랑? 러시아 사람들이랑!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사건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거 지금 배워서 뭣하게?란 자문에 자답이 없다.
쿨0 0란 사이트에서 음가를 배우다가 도저히 안되겠다싶어 오프라인을 찾아보았다.
젊음과 배움이 가득한 강남의 러시아 학원에 등록했을 때 담당 선생님이 정말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 왜 배우시려고 하십니까?" 어머니란 호칭을 썼다가 얼버무리시는 선생님. 내가 너무 어려운 학생인가 보다.
거래처가 러시아여서, 사업을 해보려고,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해서 등의 정당한(?) 이유와 달리 나는
그냥 배워서 소통하려고란 말을 했는데 선생님 표정에는 여전히 "왜?"가 묻어있다.
영어는 좀 하는 편이니 어쩌면 그것을 더 배워 더 퀄리티를 올리는 게 현실적인 이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난 '쏘냐'란 러시아 이름이 좋고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러시아 횡단 열차를 쉽게 타고 싶다. 스꼴리카 스또잇(얼마입니까?)란 질문에 답하는 그들의 숫자를 알아듣고 싶다.
도와준 현지인에게 스파시바(감사하다)란 말을 해주고 싶다. 그냥 그런 이유다.
그거 지금 배워서 뭣하게?란 자문에 걸맞는 자답이 없다.
까끄 바스 자봇?(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미냐 자봇 쏘냐 ( 내 이름은 쏘냐입니다)
아진 디바 트리 취트리( 하나 둘 셋넷..)
더듬더듬 알파벳 음가를 따라 읽는다. 공부는 진짜 때가 있다. 돌아서면 잊을까 돌아서지도 않는데 금붕어보다 더 빨리 까먹는다.
누가 시작을 반이라고 했는가? 절대 반이 아니다.
이 도전은 제 풀에 지쳐 내일 멈출 수도 있고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도일지도 모른다.
뭐 하나 시작하고 하다 말고 다시 시작하고 또 하다만 취미며 취업이 한 두 개가 아닌 내 짧은 인내력의 한계가 또 금방 탄로 날 수도 있겠지싶다.
학생보다 어머니라 호칭이 먼저 나오게 하는 연령대의 외모, 처음부터 아줌마였을 것 같은
젊은이들의 시선으로는 안물안궁이겠지만 창업에 필요한 자격증이나 따는 게 그나마 자연스러울 게다.
한 번 여행다녀왔다고, 그 나라언어를 배우겠다는 시도가 그것도 울며 울며 배운다는 어려운 러시아를
시작하는 게 평범하지는 않다. 나도 그케 생각한다.
그런데말이다.
이상하게도 러시아는 푸틴보다 톨스토이가 먼저 떠오른다.
tv속의 모스크바는 관광지가 아닌 뜨거운 구호를 외쳤을 만화 주인공 알렉세이의 표정이 그려진다.
최대원유생산지란 뉴스보다 시베리아로 유배떠나는 동료의 마지막을 위로했던 장면도 따라온다.
너무 많이 보고 읽은 탓에 천사 미카엘같은 범인(汎人)이 있지않을까. 아니 있기를 바래보기도 한다.
그 탓에 러시아란 난공불락의 언어를 겁없이 시도했나보다.
가끔은 삐거덕 삐거덕 소리가 음침하게 때로는 까탈스럽게 나던 낡은 여고 도서실에서
마차를 타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무작정 나선 여인네의 무모함조차 멋있어보이던
그 시절의 나를 느끼고 찾고 싶은가보다.
많은 책을 보고 만지지만 그 때 맡았던 꾸리꾸리한 책냄새.
그 냄새는 후각이 아닌 내 안 어딘가에 여전히 느끼고, 그 비스므레한 냄새라도 맡고싶어 킁킁거린다.
내려놓지못하는 글쓰기. 포기하지못하는 글쓰기.
울고 웃는 있는 사람들 1,2,3....
완성되지못한 이야기 1,2,3...
안나나 이반일 수도 있고 아나스타샤일수도 있는 주인공 1,2,3....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기에 어떤 언어도 쉬운게 아닌게다.
이익되지않는 도전은 처음이다.
재고 따지지않고 그냥 시작해 본 러시아말배우기는 내가 만든 허구를 서두르라고 한다.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을 느끼고 한 도서실 한켠에서 시작된, 그것도 혁명이었을까?
성공하지않아도 할 수 없다. 실패한 도전이어도 별 수 없다.
그렇게 자답하고싶다.
배워서 뭐하지못한게 부지기수다.
뭐하려고 배우는지에 대답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