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풍수
도시를 건설하는 조건도 물이나 기후 같은 자연조건 외에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건설에 나타난 사고방식의 차이가 세 민족(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로마인) 이후의 운명을 좌우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조선초 도읍을 옮긴다는 말만으로도 조정은 설왕설래가 많았다.
이래도 말... 저래도 말...
태종 이방원은 복서(동물뼈.. 등을 태워 갈라진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 점괘도 해석에 따라 말이
많아지니 주역과 고려 태조(왕건)도 전(돈)으로 점을 쳤다는 예를 들어 신하들에게 그 결과에
왈가불가하지 않기를 명하며 승부수를 던진다.
한양(종로구)과 무악(서대문구), 개성에 대해 동전을 세 번씩 던져 길하게 나온 한양으로 정해졌지만
선택의 아쉬움이 남아서 일까 "난 무악을 택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반드시 그곳에 도읍을 정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모든 사안에 종지부를 찍는다.
과거 "풍수"를 말하는 것은 천도의 의미로 민중에게는 왕권 교체의 의미도 지녔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고는 하지만 정치적 욕심을 가진 지방호족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지방의 민심과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왕건의 고민은 도선의 비보사탑풍수(절과 탑을 건설하여
좋지 않은 땅을 보완한다는 의미)를 내세워 중요한 지역에 호족 세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찰을
건립하고 기존 경주 중심의 질서를 개경으로 재편하려 하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또한 시대와 생각이 다를 뿐, 개경의 기득권층 들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게 되면서
개국 군주 자신이 아닌 그의 아들 태종에 의해서 한양 이전이 이뤄지게 된다.
한양은 한강이 있어 물자 수송이 용이 한점, 사면의 산세가 수려하게 감싸 있으며 도성 내부는 평평한 점,
12C 고려 숙종에 의해 남경으로써 건설된 경험이 있어 천도에 드는 경제적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석산이 많아 물이 부족한 단점과 북악산(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직선으로 연결하였을 때 경복궁과
남쪽으로 마주한 조산인 관악산이 풍수상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경복궁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화기를
눌러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러 번의 화재와 임진왜란 이후 고종이 즉위해 중건될 때까지 275년간 조선의 법궁으로써
기능은 하지 못하고 화재로 티끌의 재로만 남아 있게 된다.
- 여기부터는 서울 풍수에 관련 책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의 본문 내용을 정리해 보고 덧 붙여 보았다. -
서울 그중에서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북쪽으로 북악산(또는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으로는 좌청룡 격인 낙산과 서쪽으로는 우백호 격인 인왕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밖으로 한 겹의 사신사가 더 두르고 있는데, 북쪽으로는 북한산, 동쪽으로는 아차산, 서쪽으로는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둘러싸고 있다.
풍수는 사람과 자연이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주역과 음양오행의 논리에 따라 이뤄진다.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인 "오행"과 그 오행의 기운과 연결되는 다섯 방향과 고유한 색깔인 "오방색",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오상"이 있다.
목(木) / 동쪽과 청색 / 인(仁),
화(火) / 남쪽과 붉은색 / 예(禮),
토(土) / 중앙과 황색 / 신(信),
금(金) / 서쪽과 흰색 / 의(義),
수(水) / 북쪽과 검은색 / 지(智)
이런 원리로 한양 도성의 성문을 지었는데 도성의 동쪽 문에는 인(仁)을 넣어 동대문을 ‘흥인지문’이라 하고, 서쪽 문에는 의(義)를 넣어 서대문을 ‘돈의문’, 남쪽 문에는 예(禮)를 넣어 ‘숭례문’이라 이름하였다.
사신사와 음양오행의 원리 등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관악산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도성 안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이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비보책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피하기 위하여 경복궁과 관악산이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도록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복궁은 정남방에서 동으로 약 3도가량 비켜 세워졌다.
이것만으로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는데 부족하다 여겨 큰 문을 정남 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하고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 내려쓰기)에 종액(縱額, 세로 쓰기)으로 달도록 하였다.
대체로 누각이나 성문의 현판은 가로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독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맞받아칠 수 있도록 세로로 달았던 것이다. 특히 ‘숭례문(崇禮門)’이라는 남대문의 이름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숭례문의 ‘예(禮)’ 자는 오행으로 볼 때 화(火)에 해당된다.
또한 ‘높인다’·‘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지 ‘숭(崇)’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만들어,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 [以火治火]는 오행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는 불을 상징하는 글자에 세로 쓰기 한 현판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대응하게 한 풍수적 방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울의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을 열어두면 음기, 즉 음풍이 강하여 풍기란이 조장된다고 믿어 숙정문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성 안의 지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관악산으로부터 들어오는 화기를 막고자 함이었다. 관악산의 화기와 관련하여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빼놓을 수 없다.
광화문 앞 양쪽의 해태 두 마리는 모두 남쪽의 관악산을 바라볼고 있다. 경복궁에 화재가 빈번하자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은 이 역시 관악산의 화기를 원인으로 보아 도성 내 뛰어난 석공에게 해태상을 만들게 하였다.
원래 해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해치라고도 한다.
해태는 뿔이 하나인 상상의 동물로서, 양과 호랑이를 섞어놓은 형상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사헌의 흉배에 해태를 새기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하기도 하였다.
다른 현판은 모두 세 글자의 이름이 붙어있는데, 유독 도성의 동문인 ‘동대문’에는‘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네 글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 까닭은 흥인지문 일대의 땅 모양새에 있다. 혜화동의 뒷산 인낙산에서 이화여대 부속병원, 동대문, 그리고 장충동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울의 성곽이었는데, 특히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전 동대문운동장에 이르는 구간의 산줄기가 약해 그 기운을 보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부족한 땅의 기운을 보태기 위한 방책의 하나가 문 이름에 글자를 더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한 글자가 ‘갈지之’였다. 곧 ‘가다’는 뜻으로 산줄기의 흐름을 길게 이어준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도시都市’라는 글자가 오래된 문헌 속에 나타나는 예는 중국의『한서漢書』이다. 여기에 기록된 도시는
도都와 시市의 합성어로, ‘도’는 왕이나 군주가 거쳐하는 곳을 의미하며, ‘시市’는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시場市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왕이 거처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상업이 번성한 곳을 이르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도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라는 용어가 그 이후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사용되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