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시작한 일이 작은 변화를 가져오다
키 차이 20cm.
남편 상의 평균 사이즈 100.
남편의 옷을 처음 입은 건,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기분전환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날따라 남편의 캐주얼한 스트라이프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창 밖의 화창한 날씨가 한몫했을까, 평소 안 하던 일을 해보고 싶은 바람 같은 게 잔뜩 들어간 그런 날이었다. 크림색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남편의 스트라이프 셔츠를 걸쳐 보았다. 팔이 길어 소매를 몇 번 접어 올리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서 자주 입는 니트를 어깨에 걸치고 나니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형아, 엄마 이상해. 아빠 옷 입었어!" 비록 아이들에게는 들켰지만, 외출에서 돌아온 뒤 조심스레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접었던 소매를 펴두는 것을 잊지 않고.
셔츠는 내게 그런 옷이다.
“오늘 약속 있었어?”,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전업주부, 집순이인 내가 동네에서 입고 다니기엔 영 부담스러운. 가끔 도전하고 싶지만 장바구니에서 결제 전에 탈락되고 마는 옷 중에 하나인 것이다. 연중행사로 입는 블라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티셔츠나 맨투맨보다 실용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쉽게 안 사게 되는 옷이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자친구의 셔츠를 입으면 익숙한 향기에 코르티솔이 분비되어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남편 셔츠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파스 냄새가 코르티솔 분비에 영향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우연히, 남편의 셔츠를 입고 오랜만에 짜릿함을 느꼈다.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라 오버핏이 부담스러웠다.
어른 옷 훔쳐 입은 아이처럼 보일까, 다리가 짧아 보이진 않을까 크롭 스타일의 상의도 즐겨 입었다. 그래서 입으면 (너무 넓거나 너무 붙지도 않게) 늘 적당하게 몸을 감싸는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 편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는 남편의 의견을 너무 믿은 것도 문제였다. 시대의 흐름을 놓치고 살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레트로냐 뉴트로냐, 넓은 어깨, 통 큰 바지도 괜찮은 세상이 되어 있었다. 입었을 때의 편안함을 이제야 알아서 억울할 지경이었다.
남편 옷에 더욱 손이 자주 가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이후였다. 외출이 어려워지니 필요한 옷의 가짓수가 더 줄어들었다. 헌 옷에 대한 기사를 보고 '1년 간 옷 사지 않기'를 하면서 옷장에서 나의 공간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지루함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가는 곳이 동네 어딘가여도, 마스크에 가려 콧바람은 못 쐬어도 뭔가 하나는 바꿔보고 싶은 그런 날에는 나도 모르게 남편의 옷들을 슬쩍 들춰 보게 되었다. 다행히도 옷에 대한 취향이 비슷해서 제법 선택지가 될 만한 것들이 있었다. 블랙, 베이지, 그레이 같은 무난하고 활용도 높은 컬러와 스트라이프, 체크 같은 베이직한 상의 옷들이 나의 목표물이었다.
옷장 구석에서 1+1의 목폴라도 발견!
'으이구~ 사놓고 안 입다니!' 니트로 된 목폴라는 입었을 때의 까끌거림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베이지와 블랙을 크림색 바지와 청바지에 각각 맞춰 입으니 의외로 괜찮았다. 그 외에 운동용 바람막이나 맨투맨, 집업 후드티 등등. 남편이 출근할 때 입을 수 없는 옷들은 평일에 나의 차지가 되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게 아니라,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어 대담함을 넘어 당당해졌다. “이거, 오늘 내가 입을 거야!” 남편은 와이프에게 기꺼이 자신의 옷을 내줘야 했다.
겨울 패딩 하나 없는 나.
웰론 충전재의 패딩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납작해져 재작년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어떻게든 겨울 패딩을 장만했어야 하는데, '옷 안 사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쇼핑 카테고리만 들어가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남편의 패딩을 박시한 스타일이라며 입으면서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어느새 겨울의 끝자락이 되었다. "내년에 남편 사이즈로 사서 같이 입을까?” 물론, 남편도 자신의 옷 하나 늘어나는 거니까 밑지는 장사는 아닐테고.
그러던 어느 날.
"잘... 어울리네.........”
나의 그레이 머플러를 두르고 남편은 출근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옷장을 공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