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갖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가질 수 없는 예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내려놓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물건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나아진 건지, 마음을 챙길 준비가 되어서 물건을 정리한 건지도 사실 모호하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 듯하다. 물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마음이 투영된다는 것. 흐트러진 물건을 보고 화가 인다면,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주위의 물건을 가만히 바라볼 때가 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떠한 상태일까.
나에게는 마음에 딱지가 앉았던 시간이 있다. 여러 감정들이 상처처럼 굳어져 단단해진 딱지였다. 보기도 싫고, 어서 빨리 떨어져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에 깔끔하게 떼어 버리면 시원할 텐데. 하지만 묵힌 감정들을 섣불리 뜯어내 봐야 또다시 피가 날 뿐이니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감정들이 해체되고 가벼워지기를 기다리며. 하나씩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에 위로를 건네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11년 치의 다이어리를 모아 사진을 찍었다. 사실 일상의 기록들은 특별한 게 없다. 그날의 작은 이슈, 생각, 먹은 것들. 게으름에 위클리는 텅텅 비어있다. 먼슬리 부분만 토도독- 뜯어내고, 이제는 먼슬리와 메모로 조합된 얇은 다이어리에 정착했다. 과거의 다이어리들은 커버를 벗겨 종이뭉치가 되었다. 깔끔하고 고급진 가죽 다이어리로 통일감이 있다면 더 좋았을까. 이제는 괜찮다. 모든 게 색을 맞추고 심미적으로 아름답지 않아도 충분하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그 안에 담긴 것들. 내 손이 닿았던 이 먼슬리의 네모 칸들이, 하루 하루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었으니까.
그렇게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물건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고 받는 것들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알맞게 조율하고, 담아 두었던 감정들도 풀어나갔다. 그리고 더 넓게, 그 너머의 환경이야기까지도 알게 되었다. 물건들과의 이야기가 하나씩 쌓이다가, 구슬 꿰듯 이어가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니멀, 맥시멀, -트/ -터 / -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입힐수록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다. 초점이 자꾸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텅 빈 공간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멋진 살림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에 대한 관심이 삶을 대변해 줄 수도 없는데. 이 물건 탐구에서 내가 찾는 이야기는 뭐였을까? 브런치 북의 마지막을 꿰매다가 빙글빙글 맴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건에도 품위가 있다면, 매겨진 가격이나 브랜드가 아니라, 그 물건을 다루는 방식, 대하는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곳은 그곳이었다. 언제나 배우고 싶은 사람. 바로 타샤 튜더 할머니이다. 손뜨개도 못하고, 가드닝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이 막연하고 대책 없는 동경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효하다.
'손 닿는 곳에 기쁨이 있다'
타샤 튜터 할머니 책에서 읽은 이 문장을.
자신이 가진 것들에 애정을 갖는 일.
부지런하게 일상을 가꾸고 온기를 채우는 삶.
내가 가진 물건들과 함께하며,
배우고 싶었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