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속 ‘천룡인’이 현실의 계급이 되다
우리나라든 중국이든, 공정성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대입니다.
특히 공정한 경쟁의 상징이어야 할 입시에서 특혜나 비리가 밝혀지면, 엄청난 비난과 사회적 풍파를 일으키곤 합니다.
얼마 전 중국 연예계에서는 영화 봉신(封神)으로 큰 주목을 받은 신예 여배우가 입시 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우연히 밝혀지며, ‘천룡인(天龙人, Tiān lóng rén)’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오늘은 모두가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이 신조어, 천룡인(天龙人)에 대해 알아봅니다.
원래 天龙人(Tiān lóng rén, 티엔롱런)은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등장하는 '하늘에서 태어난 신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원피스》 세계관에서 이들은 모든 규범과 법 위에 군림하며, 일반인들에게는 도덕적·법적 책임이 없고 타인을 노예로 부리기도 하는 절대적 특권층으로 묘사됩니다. 즉, 현실과 동떨어진 '부조리한 권력' 그 자체의 상징이라 할 수 있죠.
이 설정은 너무나도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중국 사회에서 경제적 부와 권력, 명문대 입시·취업 등에서 ‘특혜’를 누리는 일부 계층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증폭되면서, 중국 네티즌들은 이들을 ‘天龙人(티엔롱런)’에 빗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화제가 됩니다.
·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대형 병원에서 ‘뒷문’으로 검사도 안 기다리고 진료받는 사람
·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군에 따라 아파트 가격을 10배로 올릴 수 있는 부모
·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기 전에 미리 정보를 이용해 매입해 놓는 투자자
· 세상 물정 몰라도 부모의 배경으로 승승장구하는 관료 2세
…
현실 속 ‘불공정’은 판타지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상황.
그래서 사람들은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로 현실을 표현하게 된 것이죠.
중국 인터넷에서는 ‘계층의 은어화’가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天龙人(티엔롱런)에 맞서는 개념으로는 地狱人(dì yù rén, 디위런), 즉 지옥인이라는 말이 쓰입니다.
天龙人(천룡인, 티엔롱런) = 현실의 특권 계층
地狱人(지옥인, 디위런) = 고통과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이런 표현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계층 간의 거리감, 심리적 좌절, 그리고 사회 구조에 대한 집단적 체념을 반영합니다.
신분증 없이도 고속열차를 탈 수 있는 VIP 승객이 있을 때,
입시 특혜를 받은 연예인 자녀가 폭로될 때,
기업가 자녀가 수백만 위안짜리 선물을 생일로 받을 때...
이런 사례가 퍼질 때마다 댓글에는 이렇게 달립니다.
“果然是天龙人,我们是地狱人(Guǒrán shì Tiān lóng rén, wǒmen shì dì yù rén)。"
: 과연 천룡인이다, 우리는 지옥인일뿐.
天龙人(천룡인, 티엔롱런)과 地狱人(지옥인, 디위런)이란 용어는
특권층에 대한 반감을 감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통로로,
유머와 체념이 결합된 인터넷식 저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天龙人(티엔롱런)은 욕할 수 없을 때 쓰는 대체 은어이자,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소셜 해시태그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비슷한 단어는?
天龙人(티엔롱런)은 우리나라의 ‘금수저’보다 날카롭고, ‘SKY 캐슬’보다 절망적인 표현입니다.
‘헬조선’ 담론과도 일부 겹치지만, 더 냉소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현실을 포기한 자의 자조적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天龙人(티엔롱런)’을 조롱하며 디지털 분노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저 지옥인들의 체념 어린 웃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판타지 속 이야기 같던 단어가,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회 용어가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지옥에서 天龙人(티엔롱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地狱人(지옥인, 디위런)으로 살아가는 저는
오늘도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