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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진 Apr 03. 2021

그 시절, 우리가 꿈꾸었던 '로망'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마로니에 – 칵테일 사랑











 어린 시절 부모님이 노래방에서 듀엣으로 함께 불렀던 노래, ‘칵테일 사랑’.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사와 부드러운 미성, 가성의 조합이 좋아 이후에도 종종 자주 듣곤 했던 노래다. 사실 유명한 곡에 비해 가수 마로니에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자주 거리 공연을 하던 혜화 마로니에 공원을 생각하면 그곳에서 파생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한때 칵테일에 로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름도 ‘칵’이 들어가서인가, 왠지 청량한 느낌도 들고 소주, 맥주니 하는 다른 술보다 우아한 이름을 가졌으니까.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수많은 종류의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칵테일들이 나오는데, 칵테일의 맛을 기대하게 된 건 당연지사다. 멋들어진 느와르 작품 속에서 나오는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 앞자리에 앉아 술을 주문하는 기분은 어떤지 궁금했다.



 작년에 성인이 된 뒤 친구들을 조르고 졸라 가까운 칵테일 바에 갔다. 그곳은 고급스러운 바가 아니라 친구들끼리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룸 형식이었다. 칵테일도 다양한 잔에 가니쉬가 올라간 형태는 아니었지만, 영롱한 칵테일 색은 사진만큼 예뻤다. 맛도 적당히 달콤한 메뉴를 주문해서 즐겁게 마셨다.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칵테일 바에 발도 들이지 못하지만, 그 시절 꿈꾸었던 로망은 적당히 현실적인 쪽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꿈꾸었던 로망이 있다. 한 손에는 전공 책,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캠퍼스를 거니는 대학생. 바다가 보이는 호텔 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며 즐기는 호캉스. 1등석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나 한가득 내린 눈을 밟고 이글루를 만드는 상상 등 너무나도 다양한 낭만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기가 되어준다.



 로망은 현실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동심처럼 ‘로망’으로만 남았기에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작가가 되기 한참 전인 어린 시절, 나 역시도 직업적 로망이 있었다. 중학교 때 작가라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을 잠시 걸었던 때가 있다. 중학교에서 3년 내내 연극부를 했었는데, 고만고만한 학교 동아리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바빴던 동아리였다고 확신할 수 있다.



 치기 어린 1학년 시절, 조용하던 내가 연극부를 신청한 건 이유가 있다. 유치원을 다닐 적 재롱잔치로 했던 동화 ‘백설 공주’ 연극 때문이었다. 영어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을 하고 연극이었던 백설 공주 연극도 대사를 전부 영어로 바꾸어 진행했다. 당연히 연기 연습을 하기 전 배역을 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백설 공주의 주역은 단연 백설 공주, 마녀, 그리고 왕자. 특이하게도 원작 백설 공주와는 차이가 있어 왕자가 세 명이나 필요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난쟁이 역을 맡게 되었다.



 ‘소극적 관종’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조용하지만 사람들 앞에 서서 주목받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더더욱 소극적인 사람이라, 주인공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번쩍 손을 든 친구가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보며 아쉬운 마음만 달래야 했다. 나는 여러 명 중 하나인 난쟁이로 무대에 서게 되었지만, 최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연습에 임했고 훌륭하게 극을 마쳤다.



 그때의 추억이 담긴 재롱잔치 영상은 비디오테이프에 담겨있는데, 지금은 영상을 재생할 장치가 없어서 보지 못 하는 게 아쉽다. 독사과를 먹고 공주를 찾아온 세 명의 왕자들이 전부 키스를 해도 공주가 깨어나지 않아 난쟁이들이 그들을 쫓아냈는데, 내가 왕자들을 밀칠 때 연기에 몰두에 상당이 힘주어 밀친 게 기억이 난다. (여담으로, 세 왕자의 키스에도 깨어나지 않은 공주 친구는 아빠의 키스로 깨어나는 엔딩이었다. 나는 본 연극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공주 역을 맡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당시의 기억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인지, 나는 항상 무대에 올라 남에게 주목받는 걸 꿈꾸었다. 초등학생 때야 학예회를 하면서 모두가 한 번 이상씩 공평하게 무대 위에 오르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그 무대에 설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된다. 일 년에 단 한 번 하는 축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과 경쟁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무대에 오를 기회를 찾던 중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연극부였다.



 나는 같은 반 친구를 끌고 들어와 연극부 오디션장에 찾아갔다. 1학년은 네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아직 무서운 2, 3학년 선배들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대체 어디서 용기를 얻은 건지, 직접 짜낸 콩트 시나리오를 가져와 선배들 앞에서 개그 연기를 선보였다. 1학년 축제 오디션 관련해서도 부끄러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함구한다. 아무튼 나와 친구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연극부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배우 지망으로 합격했지만 3학년 선배들 사이에서 1학년들이 어떻게 활개를 펼치겠는가. 우리는 소품 담당을 맡게 되었다. 음향, 조명도 아닌 어두운 무대에 소품을 세팅하고 조명이 꺼진 사이 황급하게 움직이는 게 역할의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3학년 선배들은 정말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했다. 대회에서 대상도 타고, 축제 무대에도 올랐다. 역시 축제에서도 무대에 오르는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늦게까지 과학실과 지하 체육실, 강당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고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주차장 옆에서 연습하던 그 시절의 열정은 어디에서도 다시 찾지 못할 것 같다.



 2학년이 되고 3학년 선배들이 모두 떠나가면서 우리가 연극부의 부장이 되어버렸다. 급하게 오디션을 개최해 2학년 동기들과 3학년 선배들을 모집하고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3학년 선배들은 제대로 연습에 임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내내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3학년 선배들을 퇴출시킨 뒤 2학년 만의 연극부를 꾸렸다. 3학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랴부랴 아는 친구들을 데려와 만든 2학년의 연극부는 힘겹지만 어떻게든 굴러갔다.



 연극부장을 맡으면서 나는 배우부터 시나리오 작가, 음향과 조명까지 전부 담당하게 되었다. 연극은커녕 연기도 잘 모르는 친구들과 함께 부족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어색하게 연기를 하고, 대회 당일 음향기기와 조명 만지는 법을 배웠다. 준비 기간이 부족했던 대회는 엉망진창으로 끝났고 남은 건 축제였다. 대회의 수모를 이기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축제 대본을 썼다.



 연극부 담당 선생님은 우리의 연기력 향상을 위해 외부 강사를 초청해 오셨다. 본격적으로 기본기 강습을 받고 함께 무대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손보고, 들어갈 노래를 고르고, 각자 배역을 맡아 내가 직접 만들어간 연극이 얼마나 즐겁던지! 축제는 제법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었고, 처음부터 연극부를 함께했던 친구들은 연극부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연극부장으로 남아있었다. 계속 연극부에 남아있어 주었던 내 친구들과 새로이 뽑은 1학년들을 데리고 3년의 연극부 생활을 시작했다. 2학년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고, 그렇기에 더 좋은 결과를 내보이고 싶던 한 해였다. 축제 당시의 시나리오가 좋아 그 시나리오를 손봐 대회에 나갔고 수상을 했다. 배우들이 반쯤 바뀌어 다시 준비하는 시간이 촉박했지만, 또 그 무대에는 내가 나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2학년 때 축제 연극은 ‘교육적’인 면에 치중하느라 선생님들은 만족했어도 친구들의 재미는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3학년 축제에서는 교육이나 교훈을 버리고 재미에 치중하기로 했다. 힘을 훨씬 풀고, 유치원 때 연기했던 ‘백설 공주’ 이야기를 나만의 버전으로 바꾸었다. 공주가 아닌 ‘왕자’가 주인공이었고 시대는 서양이 아닌 동양풍, 즉 조선 시대로 세계관 자체를 변환했다.



 그래서 나는 하고 싶었던 주인공 역을 맡았을까? 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공주와 왕자의 성별을 전환했지만 여자 친구가 왕자 역을 맡고 남자 친구가 공주 역을 맡아주었다. 내 역할은 왕비였다. 왕자의 외모를 질투하는 게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한 왕자를 왕궁에서 쫓아내려는 왕비.



  시나리오가 유쾌해서인지 함께 하는 연극부 친구들도 즐겁게 역할을 받고 연기를 했다.  더 질 좋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연극부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복 대여점에 가서 의상도 골라 입히고, 좋은 핀 마이크를 대여해오고, 빌리기 어려운 강당 무대를 한 달 내내 빌려 우리가 충분히 무대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열심히 준비한 축제 연극 ‘백설 왕자 이야기’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쉽고 재밌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웃겼고 완성도 높은 무대 준비와 연기력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내 3년 연극부 인생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연극의 세계에 잔뜩 매료된 상태였고, 동아리 활동을 벗어나 직접 극단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로 연극을 하고 싶었고,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사람들의 칭찬에 힘입어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외부 강사 선생님이 활동하시는 극단을 따라가 연습하는 걸 감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과 직장인들이 두루 섞인 지역 극단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로망과 현실이 다를 때도 있다. 극단 연습실은 화려하지 않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라 열악했다. 작은 거실 무대에서 극단 사람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쁘게 음향을 조절하는 고등학생 선배들을 보았다. 취미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극단 사람들은 진지하게 연기했고 연극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연기를 잘했다.



 무대 연습을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불렀다. 연극의 세계는 동아리 활동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막내로 극단에 들어오게 되면 한 시간 일찍 와 청소를 하고, 몇 년간은 음향과 조명만 만지게 될 수도 있다며 연극계의 현실을 살짝 알려주셨다. 나는 그 말에 지레 겁을 먹고 연극을 내려놓게 되었다. 참으로 얕은 관심이라고 지적받을 만도 하지만, 연극보다 간절한 글이 있었기에 더욱 쉽게 연극이라는 길에서 등을 돌렸던 것 같다.



 연극은 그렇게 나의 로망으로, 나의 추억으로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연극과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면서 아름다운 무대의 뒷면도 알게 되었다. 연기 입시를 하려면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써가며 재능 있는 천재들과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겨야 하고, 배우가 된 뒤에도 소극장이나 극단 막내로 시작해 힘겨운 무명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걸. 대공연장에서 번쩍 떠서 화려한 모습을 뽐낼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작가로 데뷔하고 작가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 작가에 대한 로망도 산산이 부서지고 처절한 현실만을 맛보고 있다. 한때 꿈꾸었던 연극계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길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로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일찍이 현실을 알고 포기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피해, 포기하지 않는 고집쟁이에 미련 덩어리들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길의 초입부터 겁먹고 도망가는 사람이 절반이라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반의반이다. 끝없이 걷는 사람 중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반의반의 반이거나 그마저도 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내가, 그들이 로망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들은 그 시절 꿈꾸었던 로망을 어떤 식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로망을 보고 현실에 뛰어든 사람들은 각자 어떤 방식으로 그 현실을 견뎌내고 있느냐고. 그리고 로망을 현실에서 이루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은지. 로망에서도 현실에서도 달콤한 칵테일 한 잔을 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싶다.






매주 토요일, 좋은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3~5분에 달하는 노래 한 곡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가져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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