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발견_3 DAY
나는 유치원에 다니고 싶었다. 그 당시 유치원이 조금 비쌌는지 모든 친구들이 유치원을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이 동네에서 저 동네까지 가려면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닌 차를 타고 갔어야 했기에 우리 동네에는 친구라고 해봤자 1-2명 정도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친구의 언니, 친구의 동생이 그냥 다 친구였다. 그나마 어린 시절에 차를 타고 교회에 가면 또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엄마 아빠는 끊임없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도 힘든 시기였기에 유치원이 낭비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별로 가르치는 것도 없이 돈만 많이 내라고 한다라는 식으로. 그래서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다. 유치원보다 낮은 가격인데 피아노도 배울 수 있고, 한글도 가르쳐주는 시스템이었기에 일일이 공부를 봐줄 수 없는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고, 언니와 오빠는 학원도 못 보냈는데 너는 다니는 것이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다.
내가 피아노를 제일 열심히 치던 때가 아마도 피아노를 처음 배운 1년의 기간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집에 피아노가 없었는데 어떻게 쳤을까? 밥상이 내 피아노였다. 피아노라고 상상하면서 상 위에서 그렇게 피아노를 쳤었다. 상에서 좀 진화한 것이 종이 건반이었다. 당연히 소리는 안 난다. 그렇지만 모양이 피아노와 똑같지 않은가. 신나게 쳤다. 종이가 다 닳도록. 그 시절에는 피아노 학원에 인원이 어마어마했기에 7개나 되는 레슨방이 쉴 틈 없이 릴레이로 돌아갔다. 로비 같은 곳에서 한글을 배우다가 레슨실이 비면 "누구 몇 번 방 들어가서 뭐뭐 치세요" 이런 시스템이었다. 테일러의 공장이야 뭐야.
아무튼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을 정도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치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나 그랜드 피아노는 잘 치는 언니들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 초짜들이 만졌다가는 원장 선생님께 30cm 자로 손등을 맞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처녀 히스테리를 다 우리한테 풀었던 것 같다. 손 모양이 제대로 잡히지 않거나, 허리를 펴지 않으면 자나 볼펜으로 손등을 때렸다.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주산학원에서는 주판으로 맞고, 머리를 쥐어박는 일이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다.
피아노 학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학교에 들어갔고, 열심히 사과를 지워가며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아빠가 피아노를 사주셨다. 아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년 정도 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없는 살림에 거금을 들여서 피아노를 사주셨고, 그 피아노는 아직도 오빠네 집에 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게 된 다음에는 학교에서도 반주하고, 교회에서도 반주를 많이 하다 보니 좀 지쳐었던것 같다. 상에서 피아노를 치던 열정이 없어지고, "또 내가 쳐야 해?"라는 식으로 흘러가곤 했다. 필요하다고 즉시 채워지는 것이 좋은지? 결핍이 주는 이로움이 좋은지 생각해 볼 만한 포인트다.
이외에도 주산학원, 미술학원, 서예 등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화를 배웠던 기억이다. 친구의 아버지가 한국화 화가라서 그 집에 가서 한국화를 배웠다. 그 친구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대나무를 치는 것을 배웠던 기억은 아직도 난다. 붓에 무조건 먹물을 다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에 적신 붓을 모양을 잡은 후 양쪽에만 살짝 먹물을 묻히고 대나무를 그리면, 가운데는 옅고 양쪽은 검은테가 있는 대나무가 되었고, 잎사귀를 그릴 때는 이것들이 오묘하게 섞여서 갖가지 다른 모양으로 표현되곤 했었다. 그렇게 오래 배운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들이 수묵화를 배울 일이 없다 보니 이걸로 대회도 꽤 나가곤 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고, 블로그도 작년에 시작했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내내 6년 동안 일기를 썼고, 글짓기 대회 등도 꾸준히 나갔었기에 어렸을 때의 경험들이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강압적인 엄마보다 늘 오냐오냐하는 아빠가 더 좋았다. 엄마는 매번 숙제를 체크하고, 성적표와 상장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빠는 그냥 막내라고 나를 무릎에 앉히고 예뻐하셨다. 지금도 엄마는 열심히 본인의 생활을 하신다. 각종 취미활동과 운동도 몇 가지씩 하신다. 그리고 아직도 나에게 잔소리를 하신다. 결혼한 딸에게 전화할때마다 운동을 해야한다고 잔소리하셨는데 6개월전에 운동을 시작하고 하루에 5킬로 뛴다고 하니 이제 잔소리를 못하신다.
절대 닮기 싫다고 하는 부분을 오히려 닮기도 하고, 난 결코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부분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적 맹세를 하면 오히려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엄마가 부담스러웠었는데, 그것으로 나의 Grit은 생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Grit이 생성된 것은 아주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건 아주 위험하다. 난 그들의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라고 해도 조금 더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하면 좋겠다.
성향도 목표지향적이고, 자기 관리에 엄격하고, 경주마처럼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Grit이 더해지니 반대 성향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편이다. 나와 정반대 성향이라 중도를 지키기를 좋아하고, 중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남편은 나에게 적당히를 요구하지만, 나는 그럴 바에는 시작을 안 하는 성향이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집중을 하고,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뿐인데 나의 몰입을 벅차 하는 순간이 많다. 물론 남편의 성향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또한 나는 디퍼런스 공부를 했으니 남편의 성향이 다 이해가 되지만, 남편은 그것이 아니고 나 같은 사람과 살아오지 않았기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뭘 시작하든 몇 년, 10년은 기본으로 해왔고 이것이 디폴트로 작용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좀 힘을 빼라고 한다. 똑같은 나인데 반응이 너무 다르다. 이것이 나를 힘들게 했었다. 한쪽에서는 인정과 칭찬이 넘치지만, 한쪽에서는 만족되지 않는 것의 괴리감이 한마디로 괴로웠다. 그런데 한참을 고민하고, 디퍼런스 공부를 계속하면서 얻은 결론은 그래도 다른 성향의 남편을 만나서 중화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색깔이 다소 강한 내가 남편으로 인해서 다른 경우도 한번 생각해보고, 달려가다가 물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되고, 모두가 나와 같이 않다는 생각을 예전보다 많이 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리딩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워워하고 있는 지금의 나도 벅차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열심히 할 필요가 없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읭?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기에 예전에 내가 엄마에게 느낀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워워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뭐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는 것 같다. Grit은 유지하되, 리딩을 할 때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것을 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 더 여유를 갖도록 오늘도 다짐하고 노력해야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에 나는 동의하지 않으므로. 내가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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