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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May 30. 2023

1차시도 실패

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4

  처음은 중2 때였다.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조금이 전부였다. 무작정 전철에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노선표를 한참 동안 바라만 봤다.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달리는 전철 밖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높은 빌딩들이 점점 멀어지고 야트막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토요일 낮 전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난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문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 크지 않은 대합실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교회에서나 보던 긴 의자는 대부분 노숙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차지였다. 난 빠르게 대합실을 빠져나와 거리로 향했다. 안양역 앞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익숙한 냄새를 풍기며 영업 중인 포장마차 몇 군데와 택시 몇 대가 전부였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시내버스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배가 고팠다. 집에서 아침으로 보리가 조금 섞인 흰밥에 날계란과 간장을 넣어 비벼 먹고 나온 게 다였다. 포장마차에는 떡볶이와 순대, 어묵과 튀김이 있었다. 전형적인 분식 포장마차였다. 난 떡볶이 1인분과 꼬치 어묵 2개를 선택했다. 


  안양에 처음 가본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일단 걸었다. 그 시절 어린 학생이 역 앞에 서성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알지 못하는 어른이 말을 걸어오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밥을 사준다는 말을 듣고 따라가면 새우잡이 배에 팔려 간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실제로 뉴스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사건이기도 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멀리 연탄공장처럼 보이는 곳에 높게 쌓인 석탄 윗부분이 노을과 만나 검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니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꽃가루가 흩날리는 완연한 봄이었지만 밤엔 제법 쌀쌀했다. 반소매 티셔츠에 얇은 점퍼 하나가 전부였던 나는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았다. 골목을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길을 잃었다. 점점 동네가 한적해지고 산비탈에 작은 텃밭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기(寒氣)로 인해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걷다가는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역으로 다시 가야겠다 마음먹고 기억을 더듬어 돌아가는 길에 천막이 처져있는 곳을 발견했다. 어두워서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제법 따뜻했다. 난 일단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팔이 저렸다. 구부정한 자세로 잠이 든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새벽인 듯하다. 어렴풋이 천막의 무늬가 보였다. 천막을 들춰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손이 끈적였다. 뭐가 묻어서 그런가 내려다봤다. 아직은 어둑한 가운데에도 확연한 검은색. 손이 온통 검은색이었다. 손뿐이 아니었다. 바지며 점퍼 소맷자락도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천막을 다시 들춰봤다. 새벽 여명에 어느 정도 밝아진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차 싶었다. 연탄을 쌓아두던 곳이었다. 천막 안쪽으론 아직도 몇 장의 연탄이 쌓여있었다. 


  새벽의 안양역은 여전히 노숙인으로 그득했다. 청소 중이던 아저씨가 나를 희한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곧장 화장실로 갔다. 비누가 없어 물로만 씻어내야 했다. 연탄 자국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힘주어 문지르고 또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손과 팔에 묻은 건 대부분 지워졌다. 하지만 옷에 묻은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대합실로 돌아와 빈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추위에 웅크리고 선잠을 잔 탓에 몰려오는 졸음이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좁은 대합실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1층 계단에서 위를 올려다봤다. 조용했다. 2층까지 올라가는 계단 하나하나가 가본 적도 없는 저승길 같다. 그렇게 나가고 싶던 집이 하룻밤 새 너무 오고 싶은 곳이 돼버렸다. 문에 귀를 기울여 보니 말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몇 대나 맞고 나면 끝날지 혼자 상상해 본다. 물러날 곳이 없는 나는 슬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섰다. 안방에서 나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나를 본체만체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곧 있을 마지막 선고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아무튼 나의 1차 독립 시도는 실패였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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