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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12. 2023

호기심 천국

 글쓴이의 덧붙임 혹은 변명 4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조금이 전부였다. 무작정 전철에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노선표를 한참 동안 바라만 봤다.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달리는 전철 밖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 1차시도 실패 中



  왜 안양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본 적 없고 멀었다고 느꼈나 봅니다. 한 친구의 조언도 한몫했습니다. 안양역 앞에 예쁜 여학생이 많이 온다는 근거 없는 헛소리 말이죠. 집이 싫어 떠난 길이었지만, 불과 하룻밤 새 다시 집에 가고 싶었던 1차 가출 사건은 싱겁게 끝났습니다. 혼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돌아온 아들을 혼내면 금세 다시 집을 나갈 것 같아 별 말없이 유야무야 넘긴 것일 테죠.


  담임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나갔습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저는 잔뜩 긴장한 채 학교 앞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배고플 테니 밥 먹으러 가자며 저를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데려가 늦은 점심을 사주셨습니다. 전 먹어본 적 없는 울면을 시켰고 먹다 매워서 울뻔했습니다. 선생님 역시 어린 학생의 일탈 정도로 여기시고 웃으며 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이번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별명 중 하나가 ‘호기심 천국’이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앞만 보고 얌전히 길을 걸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늘 구경거리는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동안은 맘껏 구경할 수가 없죠. 자꾸 뒤돌아보는 절 잡아채며 걸음을 재촉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세상엔 궁금한 것이 넘쳐났습니다. 책장에 있는 백과사전을 다 외울 정도로 알고 싶고 궁금한 것이 많았던 저에게 집은 비좁고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친구가 빌려준 책이 있었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시골에 사는 한 소녀의 ‘가출 모험기’ 정도 되는 내용의 소설이었습니다. 전 그 소녀의 모험을 동경했습니다. 집을 떠나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며 광활한 아메리카대륙을 횡단하는 용기가 부러웠습니다. 한동안 매일 밤 그 소녀와 함께 모험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 없던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덕분에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아무런 고민 없이 하게 됐죠.


  분명 제가 꿈꿨던 가출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독립해서 세상을 멋지게 살고 싶었습니다. 연탄 천막에 숨어들어 쭈그려 앉아 잠을 청하는 것은 계획에 있지도 않았지요. 서울에서 멀리 떠나 저를 찾기 힘든 곳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가길 바랐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꽤 많이 살아온 지금도 제 계획대로 살지 못했음을 발견합니다. 늘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오늘'이 제겐 당황스럽고 힘이 들었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같은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변함없는 똑같은 일상이 제게 안정감을 줄 거로 생각했습니다. 변화가 거의 없기에 '오늘'이란 녀석이 겁이 나지 않게 됐죠. 그렇지만 제 마음 한구석엔 늘 ‘호기심 천국’이 다시 주인공이 될 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날을 꿈꾸면서 말이죠. 오랜 시간 참았던 저의 근본적인 욕구는 지난한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올 무렵 결국 터지고 말았습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던 삶을 생각한 대로 살기 위해 모든 걸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시금 저의 계획이 무모하고 어리석을지라도 이제는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를 온전히 ‘지금’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내어 맡기고 상상하던 저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이 저를 당황하게 하더라도 여유 있게 웃으며 ‘내일 다시 만나자’ 흔쾌히 손 흔들어 보내주려 합니다. 삶 속에서 실수는 했지만 실패하지 않았음을, 그러니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글쓰기를 통해 만나는 저에게 소리쳐 봅니다.


  잘하고 있어!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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