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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08. 2023

부끄럽지 않겠어요

 글쓴이의 덧붙임 혹은 변명 11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아들은 운동장을 누비던 거친 사내가 아니었다. 어리고 여린 아이였다. 주목받을수록, 기대가 커질수록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이겨내라고 몰아가고 싶지 않았다.’

  - 괜찮아 다 잘될 거야 中



  아들을 다독이든 혼을 내든 끝까지 해내라고 해줬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저에게 얘기했습니다. 이런 거 하나 이겨내지 못하면 세상 어떻게 살아가냐는 말도 들었죠. 그 말이 맞을 수 있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이 멋지고 편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원하던 미래를 얻고 싶기 때문이죠. 혹시 이루셨나요? 그랬다면 축하드립니다.   


  삶을 살다 보니 꿈꿔오던 내일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절 기다리곤 했습니다. 다시 한번 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의 힘겨움을 견뎌보지만, 생채기만 더 커질 뿐이었습니다. 서점에 가면 독자를 위로하는 책들이 잘 팔립니다. 이유가 뭘까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다 지친 사람이 많다는 것이겠죠. 지금 잘하고 있다는 격려와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의 언어들이 우리의 멎은 숨골을 터뜨려 줍니다.


  전 아들이 지금 힘들다고 부르짖고 있는 걸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너의 미래를 위해 참으라고 말하는 대신 당장 오늘부터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좋은 오늘이 모여 더 좋은 내일이 될 거라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아까운 건 아들의 몫입니다. 전 아빠의 욕심 때문에 아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아들이 만들어 갈 삶을 제가 원하는 방식과 방법으로 이끌고 가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길을 찾아내고 살아내길 더 원했습니다.


  가끔은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아들을 인도한 것은 아닌지 자신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건강이 최고라며 얘기하지만 결국 돈이 최고라는 이중적 속내를 숨기듯이 말입니다.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 말하는 것이 마치 네가 고통스러운 오늘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나에게 곧 다가올 행복으로 연결되는 이상한 결론처럼 말이죠.


  지금보다도 더 어렸던 아들에겐 힘들었을 거예요. 더 잘해야 하고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컸을 겁니다. 즐기며 하라는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겠죠. 어른들은 이미 살아봤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작 ‘뻥축구’를 배웠던 세대들이 EPL(영국 프로축구 리그)을 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자신이 배운 게 맞는다며 주장합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전 자녀를 ‘소유’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예쁜 딸 어떻게 시집보낼 거냐며 누군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마음으론 이미 보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성인이 된 자녀를 부모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저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는 말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대신 하는 거란 옛 성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날의 아들은 아빠의 나약함을 어느 순간 보았던 것일 테죠. 더 잘살아야겠어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어 보겠습니다.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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