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 일

사실... 아니지6

by 나길


왜? 왜 뭘 쓰려고 하는 거야?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누가 들었으면 좋겠어?

네 맘을 알고 싶으면서, 니 맘을 죽이지 못해서 이렇게 악쓰고 있으면서, 그래서 쓰고 있으면서

너는, 너는 잘 쓰고 싶었어?

참, 염치도 없다






"너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게 뭐~게?"

"어... 뭔데?"

"니도 모르는 게 있나?"

"많지. 그래서 뭔데?"

"무화과! 집에 무화과가 10개 열렸는데, 조그마한 게 올라와서 꽃이 피는갑다 했는데, 조금씩 크대. 보니까 그냥 열매대. 빨리 커야 니도 주고, 김서방도 주고, 느그 아~~들도 주지."

"언제 다 익어서 먹겠어. 그냥 보는데 만족해 엄마."

"내가 꼭 익혀갖고 따 줄 거다. 그라고 또 있다. 뽕나무 열매. 그것도 안 핀다. 꽃"


엄마는...

집이 풍비박산이 나서 엄마 집에 들어온 나에게 무화과랑 뽕나무 열매 이야기만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서울에, 남편은 정리하느라 옛날 집에.

우리는 함께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전해주려고.

언제고 만나자 스치며 만난 그저 아는 사람에게 던지던 그 흔한 말조차도 지금은 못 하는데 언제 주려고.

묻지 않았다. 물으면, 백 번 물으면 무화과는 꽃을 피울까


엄만 괜찮다고만 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계속 좋을 수만 있냐고 했다.

"살다가 파아란 화분 사이에 누런 이파리 하나 보이면 그저 떼어내어 흙에 놓아주라. 그래야 다른 이파리가 괜찮아. 괜찮아. 흙에 놓아주면 영양분이 되고 흙이 되어서 다시 나무 잎으로 나온다. 괜찮다."

식물들과 함께 살다 보면, 어느 날 아침 노르스름한 점이 잎사귀에서 조그맣게 보이다가 점점 힘없이 처진 누런 잎사귀로 변해서 떨어지고, 그다음엔 다른 잎사귀, 그 옆의 잎사귀, 옆옆의, 그 옆옆옆옆의 것까지... 계속 떨어져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이었던 것처럼 떨어지다 결국 그 나무는 생명을 다 한다.

그 잎사귀가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를 계속 죽이기까지 놓아두지 말아야 한다고 내게 얘기하고 있었다.


언제쯤 이 고통이 지나갈까.

언제면 카드 채권 추심이 끝나고,

언제면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서 정리가 되고,

언제면 우체통에서 갈 곳 잃은 빚 독촉물들이 내 가슴에 와 꽂히기를 멈출까

언제면 엄마의 괜찮지 않은 깊고 검은 동공과 혼탁한 수정체가 하는 말이 오롯이 진실로 받아들여질까

언제면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와 같은 깊고 검은 동공과 혼탁한 수정체를 가진 내가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럴 거야 그러니 그런 것처럼 들어달라고, 그런 것처럼 살아달라고, 그런 것처럼 보여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멈출 수 있을까

언제면 아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몸의 진동과 파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누렇게 변해가며 나를 죽이고 아이들까지 전염되게 만들고서 함께 흙이 되고 싶지 않다.






연극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무대의 조명은 모두 꺼진 채 20초간 암전이다.

작은 점 같은 불빛이 왼쪽 무대 안 쪽에서 나타나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다시 앞으로, 왼쪽 앞으로, 그리고 나타난 그 자리로 돌아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렇게 도는 동안 불빛은 어느새 점에서 점점 커져 무대를 환히 비추는 횃불이 되어있다.


무대는 몇몇 사람이 여기저기 서있다. 횃불이 된 작은 점은 왼쪽 무대 안 쪽에 있는 한 사람의 손에 들려있다. 그 손에 쥐어진 단단한 철제 성화봉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은 세차게 위로 위로 위로, 그리고 옆으로 움직인다. 끝없이 올라갈 것 같던 횃불의 끝은 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무대를 채워 갈 때마다 작아지고 흐려진다. 무대에 사람들이 꽉 차 더 이상 발을 디딜 곳이 없어 보인다. 관객들은 모두 어느새 꽉 차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무대 바닥을 보면서 사람이 몇 명인지에만 집중한다. 무대를 덮은 하얀 신발들이 작은 걸음으로 움직인다.

처음에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3번

조금 더 빠르게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4번

조금 더더 빠르게 오른쪽으로 네 번 왼쪽으로 5번

조금더더더 빠르게 오른쪽으로 다섯 번 왼쪽으로 6번

.

.

.

어느새 빨라진 걸음은 꽉 찬 무대를 벗어나 허공을 밟고 움직이고 있다.

점점 더 횃불은 왼쪽으로 왼쪽으로, 있었던 곳 보다 깊게 들어가 버리고 만다.


허공에 떠 있는 발들은 더 이상 그 형체가 보이지 않고, 하얀 신발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희뿌연 안개만 왔다 갔다 한다. 왔다 갔다 왼쪽 오른쪽 천천히 부드럽게 빠르게 거칠게 빠르게 빠르게...


무대엔 희뿌연 연기만 남아 사라지고

무대는 펑 비어있다


관객도 사라진다






철로 만들어진 틀에 놓인 삼각뿔의 도자기에는 작은 선인장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얼마 전 엄마가 큰 선인장에서 옆으로 생겨나기 시작은 작은 아이를 옮겨 심었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선인장은 뿌리를 잘 내리고 있을까. 식물을 키우는데 문외한인 나는 의심스럽다. 그냥 선인장에 붙어서 살도록 두면 더 잘 살지 않나. 굳이 떼어내어 심어야 하나. 물도 안 주고 몇 날 며칠을 흙 속에 그냥 꽂혀있다.

삼각뿔의 아슬아슬 함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작은 선인장의 생명을 대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한 참을 서있었다.

한 참을 있다 돌아서는 나는 눈물이 났다.


황량한 그 화분의 흙이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같아서.

언젠가 삼각뿔의 화분이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아서.


난 여전히 아흔이 다되어가는 늙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는 것 같아서.

내 등에 작은 선인장이 끝내 뿌리내려 박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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