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꿈 많던 나를 만나러 갑니다

'꿈만 큰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기까지

by 김나현 작가


시원한 방 안에서 서핑레슨을 한번 더 신청할지, 아니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갈지 고민할 때가 행복했다. 캐리어를 끌고 우두툴한 보도블록을 지나오면서 캐리어 바퀴가 찢어졌고,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캐리어를 끌고 가느라 낑낑거리느라 옷이 땀에 젖어 착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그랩이나 고젝같은 어플을 깔고 오지 않았던 터라, 버스를 타고 우붓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짐을 끌고 와 보니 여기는 캐리어가 굴러갈 곳이 아니었다.



여러 번 걸어 다니며 오갔던 길이라 캐리어를 끌고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잘 굴러가지 않는 캐리어를 거의 들다시피 가지고 가다가, 구글맵에 표시된 우붓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눈앞에 보일 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했다. 곧 올 예정인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에 앉아 그동안 발리에서 있었던 일들의 글감을 정리하는 모습, 신혼여행에서 다녀왔던,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보는 나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 기간 동안 숙소를 예약한 것 외에 미리 알아보거나 어떤 걸 해야겠다고 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너무 힘들었고, 신혼여행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기만 해도 행복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우붓이 그렇게 예쁘고 아름답다는데 한 번 즈음 가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즉흥적으로 숙소에 부탁해서 하루짜리 우붓투어를 예약했다. 내 기억 속의 우붓은 우리나라의 옛 시골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소박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 발리를 떠나기 전에 이곳을 한번 더 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버스가 없는지도 몰라....,

그러나 구글 맵에만 등장하고 끝내 오지 않는 버스 세 대나 보내버린 후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불쑥 나왔다.

'아...., 어쩌지? 매니저님께라도 부탁을 드려볼까?'

고민 고민하다 결국 서핑캠프 매니저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우붓으로 가는 차를 예약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았다. 매니저님은 우붓을 버스 타고 이동할 생각을 한 나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흔쾌히 차를 예약해 주셨다. 밴을 타고 우붓으로 오게 될 줄은 상당도 못 했지만, 서로의 몸에 자신의 줄기를 얽히고설킨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우붓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우붓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연꽃사원을 찾아보았다. 사원으로 향하는 양 옆에 연꽃이 피어있고, 고즈넉하면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소품들과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때는 이름도 몰랐는데, '사라스바티'라는 이름을 가진 사원이었다.



남편과 함께 갔던 그 사원을 찾아가며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마주했다. 10년의 시간은 나뿐만 아니라 발리도 바꿔놓았다. 익숙한 풍경을 찾아 사원을 향해 가면서, 낯선 풍경에 멈춰 섰다. 신혼여행 당시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던 예술가들은 이제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이가 되어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공사 현장의 돌멩이를 바구니에 이고 나르고 있었다. 소박한 시골길에서 여느 도심이 되어버린 우붓에는 구걸하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우붓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우붓의 모습에 실망할 즈음, 사원을 찾았다. 연꽃이 피어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살펴보니 이곳이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입장료를 받는 곳이라는 구색에 맞게 사원의 이곳저곳을 색색의 천으로 꾸며 놓고, 입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특정한 복장을 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도 아름다웠던 과거의 모습이 사라져 아쉬웠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할지 주변을 살펴보니 '발리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팔던 스타벅스는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고, 그 옆에는 카페가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느니, 카페에 가는 게 낫겠어. 스타벅스를 가느니 현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가보는 게 훨씬 낫지!'

사원이 아름답게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점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살펴보다 'GODA'라는 메뉴에 그동안 잘 먹지 못했던 채소들이 있는 것 같아 신선한 채소를 먹고픈 마음에 음식을 시켰다. 점원이 내온 음식을 보며,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신선한 채소를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접시 속 채소는 길거리의 아무 풀이나 뜯어 씹는 맛이었다. 두부인지 콩인지 모를 그 튀김은 대만에서 맛보았던 취두부 보다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맛이 보장한 선택을 하기보다, 몸으로 부딪히며 의외의 행복감을 맛보려 했던 게 욕심이었구나 싶었다.

'이런 음식을 이 값에 판단 말이야? 완전 자릿값이네!'

화가 난 것도 잠시, 음식 값이 아까워서라도 우격다짐으로 음식을 하나하나 꼭꼭 씹어먹으면서 사원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우리처럼 신혼여행을 온 부부들도 눈에 띄었다. 사진을 부탁하고, 포즈를 취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저기 서 있었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꿈 많은 여성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가정을 일구고, 그 속에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며, 나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꿈꿨다.

상상한 것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니까 아이들을 잘 키울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한 것과 다르게, 엄마가 되는 일은 몸과 마음이 녹록지 않았다. 부모가 되고 그전에는 전혀 만나지 못했던 나의 밑바닥을 끝없이 갱신해 나갔다.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 될 거라고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여전히 서툴고 실수하는 나를 마주해야 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온몸으로 깨달아가는 것처럼, 우붓에서의 시간도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곳이 되어 있었다.

에휴, 나도 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꾸따에서 우붓까지 오는 여정, 그리고 상상했던 우붓의 모습과 전혀 다른 우붓을 만나며 실망하는 내 모습이 꼭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닮은 듯해서였다. 맛없는 음식을 돈이 아까워 우적우적 씹어먹는 일을 멈췄다. 한쪽으로 접시를 밀어놓고 가져온 일기장을 펼쳐서 버스에서 하려던 글감 정리를 시작했다.

펜을 들자, 문득 예전에 같은 곳에서 남편과 사진을 찍던 내가 보였다. 티 없이 해맑게 웃고, 꿈 많던 여자. '사회생활 10년 차 선생님, 두 아이의 엄마'라는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떨 거라고 상상했을까? 아마도 성숙하고, 여유로우며,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버스도 오지 않고, 캐리어 바퀴도 찢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현실에 멈춰 서서 투정만 부리는 대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도움을 청할 용기를 내고, 맛없는 음식에 돈을 썼다고 후회하다가도, 결국 그 경험에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지금의 나는 내가 꿈꾸던 완벽한 사회의 구성원도, 완벽한 엄마도 아니었다.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온몸으로 깨달으면서도, 이 고단한 현실 속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으려는 꿈. 꿈만 큰 이상주의자였던 내가, 지금은 땀 흘리고 실망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땀에 젖은 채로 캐리어를 끌고, 기대와 다른 풍경에 실망하면서도, 버스에서 글감을 정리하려던 초심을 잊지 않고 일기장을 펼친 것처럼 말이다.

하나하나, 글감을 정리하는데 사원 앞이 분주했다. 의자를 나르고 어떤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그곳을 오갔다. 알고 보니 그날이 일주일 중에 사원에서 발리의 전통춤인 깨작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절제된 손 끝의 동작과 표정, 그리고 전통 악기의 연주까지! 깨작 공연을 한번 즈음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도저히 일정이 안 될 것 같아 포기했던 나에게,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선물했다.


견디기에 충분한 인내와, 믿기에 충분한 순진성을 당신의 내부에서 찾아내십사 희망합니다. 어려운 것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고독에 대해서 더욱더 깊은 신뢰감을 가져달라는 희망입니다. 또 인생으로 하여금 제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인생은 옳은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맞다. 삶이 나에게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형편없이 맛없는 음식을 내밀거든 기꺼이 맛보고 먹어보리라. 그리고 주는 선물은 달갑게 받아보리라.

꿈만 큰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어 가는 데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펼쳐질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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