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전세 낸 날, 파도 위에서 춤을
'지금 몇 시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번쩍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알람을 맞춰둔 시간보다 이른 5시 30분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
비몽사몽 한 몸을 이끌고 설탕을 들이부은 듯 단 커피를 공복에 마시며 정신을 깨워온지 벌써 5일째였다. 나에게 주어진 발리에서의 일정은 8일이었지만, 서핑레슨권을 5회만 결재했다. 운동을 꾸준히 해 오지 않았던 사람이라, 계속 서핑을 했을 때 내 몸이 이 일과를 버텨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신혼여행을 왔을 때도 서핑과 사랑에 빠진 그날, 다음날 한번 더 서핑을 하리라 다짐했지만 온몸이 쑤셔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서핑을 못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령 없이 힘만 주는 패들링이 그만큼 힘들고 아프다ㅠㅜ)
마지막 서핑을 응원하려는 듯 선물처럼 날씨가 맑았다. 습하지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서핑캠프 오피스에 도착해 지난 서핑영상을 살펴보며 피드백을 받았다. 인스트럭터는 꾸준히 나의 어색한 팝업 자세를 고쳐주고 싶어 했다. 거울 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했지만, 바다에 나서는 순간 모두 잊어버렸다.
'파도만 생각하자.'
"오늘 파도 차트를 보니까 발리 서퍼들이 여기 다 모일 것 같아요. 스랑안에 가 보고 사람이 너무 많으면 베이비리프로 이동할게요. 나현 씨, 사람 많으면 초보자들은 조금 더 조심해야 해요. 파도 타려고 해도 중간에 사람이 보이거나 할 수 있으니까, 그럴 때는 갑자기 뛰어내리지 말고 시선을 완전히 틀어버리세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보드 방향도 틀어질 거예요. 오늘 파도 타 보고, 레슨 더 신청하고 싶으면 말해주세요. 그런데 내일부터는 파도가 좀 커질 것 같아요."
"네."
"오늘 인스트럭터는 1:1로 매칭했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오늘 나현 씨 마지막 날이니까 드론이랑 카메라 많이 찍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은 아닌 거야.'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더 집착적으로 파도에 매달릴 걸 알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파도를 즐기지 못할 거라는 것도 말이다. 나에게는 아직 2박 3일이 남아있으니, 원하면 한번 더 서핑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보트를 타고 라인업으로 향할수록 해안에서 바라본 것보다 바다는 더 반짝이고 푸르렀다. 날씨는 끝내주게 좋았고, 파도는 더 끝내주게 좋았다.
'사람이 많을 거라 했는데, 별로 없네?'
매니저님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착한 라인업 위치에서 보트에 탄 우리는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와, 우리 크루들이 여기 전세 낸 것 같은데요?"
변화무쌍한 바다는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주었다.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한 라인업에 아무도 없었고, 우리만 있었다. 오롯이 우리들의 파도였다. 이 바다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다들 상기된 얼굴로 보트에서 내렸다.
"누나, 준비됐어? 여기, 여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스트럭터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처럼 든든하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동생 같은 그의 손짓을 따라 나는 제법 능숙하게 패들링을 했다. 내 손길을 따라 바다가 얌전하게 길을 내어주었다.
"우리 누나, 오늘 마지막. 파도 좋아. 오~ 럭키!"
엄지를 척 치켜올리며 오늘 나를 위한 날 같다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자, 누나. 누워."
다가오는 파도에 나를 실으려는 그가 힘 있게 보드를 탕탕 내리쳤다. 동시에 내 옆에 있던 크루도 다가오는 파도를 타려는 듯했다.
"안돼, 우리 누나 오늘 마지막. 이 파도 누나 꺼."
"우리 형도 오늘 마지막!"
"안돼, 우리 누나 꺼. 자. 누나, 여기. 형은 다음 파도 타. 다음 거 좋아."
인스트럭터들끼리 너스레를 주고받으며 장난스럽게 파도 쟁탈전을 벌였고, 결국 오빠이면서 동생인 그가 이겼다. 이제 그와 내가 '패들'과 '팝업'신호를 주고받는 주파수가 제법 잘 맞았다. 처음 "업~!"이라는 말에 바로 일어섰다면, 이제는 그 말에 두세 번 더 패들링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파도가 다가올 때, 처음에는 나를 밀어주는 것 같지만 막상 너울이 생기는 시점에는 잠시 뒤로 빨려 올라간다. 그래서 파도에 올라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보드 위에 일어서면 꿀렁 내 밑으로 파도가 지나가게 된다. '뭔가 온 것 같다!' 싶을 때 두세 번 더 강하게 패들을 해야 빨려 들어갔던 보드를 힘 있게 앞으로 밀어낼 수 있다.
파도를 타는 것은 하얀 거품이 부서지기 전, 보드가 너울에 뒤로 빨려 올라갔다가 체중을 실어 미끄럼틀처럼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패들, 패들, 패드을~ 업!"
그의 신호에 맞춰 두세 번 더 패들링을 한 다음 보드 위에 올라탔다.
"아......., 하, 하하하"
파도에 몸을 띄우며 웃으면서 울었다. 파도에 오를 때마다 행복했지만 이 순간만큼 행복하진 않았다.
"내가 이 파도를 타려고, 이 순간을 만나려고 여길 온 거였구나! 흐어어어엉 흐엉 흐어엉"
가슴에서부터 올라온 감동이 눈을 타고 흐르면서 파도의 흐름과 발을 맞췄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내가 훌쩍이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는 청량한 바다와 짙푸른 숲, 그리고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저 멀리 보였다.
가족들을 모두 두고 혼자 떠나온 여행. 아이들과 남편이 허락해 준 이 여행에서 시간은 한 사람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겠다고 보내는 시간 속에는 가족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파도를 더 잘 타고, 많이 타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손에 모래를 가득 쥐려고 아등바등하면서 힘을 가득 실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모래알은 모두 빠져나가고 손에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바다는 나에게 힘을 빼보라고 말해주었다. 물 흐르듯 가볍게 들어 올린 양손에는 처음보다 훨씬 많은 모래알이 담겨 있었다.
'두둥실'
온몸에 힘을 빼고 바다가 가려는 흐름에 몸을 맡길수록, 파도가 나를 데려다주려고 했던 곳 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기억을 마지막으로 삼고 싶었다. 여전히 똥 싸는 자세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 순간만큼 머릿속에 내 모습은 여느 프로 서퍼 못지않게 멋진 폼으로 서핑을 하고 있었다.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이상적인 머릿속 모습과 현실 그 갭을 메꾸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그 과정에 서 있고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 서핑의 시작점이 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서핑을 마치고, 간단하게 물로 샤워한 뒤 사테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사테와 밥, 그리고 텀블러에 챙겨 온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아까 나현 씨 딱, 일어서는 거 봤어요. 엄청 멋있더라!"
"감사해요. 사실 저 그때 엉엉 울었어요, 하하하하;;;;"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너무 좋았나 봐요. 오늘 마지막이라서 아쉽기도 하고요."
"아, 나현 씨가 옆에 있어서 혼자만 초보가 아니라 든든했는데. 아쉽네...., "
"내일부터 스펀지보드 떼고 하드보드 타신다면서요! 와, 부러워요. 그 모습은 못 보지만 그래도 응원할게요!"
그날의 서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남은 2박 3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해 보았다.
'내일부터 파도가 더 커진다고 하는데, 오늘까지가 딱 나에게 맞는 날이 아니었을까?'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다가 알려준,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결혼하고 10년 만에 온 발리, 꼭 가보고 싶은 곳에서 남은 2박 3일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매니저님. 저, 서핑 레슨은 오늘 마지막인 걸로 할게요. 다음에 다시 또 오겠습니다!'
매니저님께 보내는 메시지는 이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다음 여정에서 펼쳐졌다.
((발리 바다가 나를 울린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