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터틀롤, 파도의 깊은 속살을 만나다
생애 첫 터틀롤, 파도의 깊은 속살을 만나다
누나, 터틀롤 할 줄 알아?
드디어 라인업으로 나가는 첫날, 인스트럭터는 나에게 물었다.
"터틀롤이요? 보드 뒤집어서 물에 들어갔다 다시 보드 뒤집어서 나오는 그거요? 책에서만 봤지 해 본 적은 없어요."
"오늘 해야 돼. 여기 앞에 나가서 한 번 해봐."
그는 어색한 한국어로 나에게 터틀롤을 해 보라고 말했다. 보드의 앞쪽을 양손으로 단단하게 쥐고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자 보드가 나를 따라 벌러덩 뒤집어졌다. 물속에서 잠시 숨을 참은 뒤, 다시 몸의 무게중심을 돌리니 어느새 보드 위에 내가 떠 있었다.
'생에 첫 터틀롤을 이렇게 쉽게 하다니!'
나 또한 놀랐다. 터틀롤은 말 그대로 Turtle Roll이다. 거북이가 구르는 것처럼 보드의 위아래가 완전히 뒤집히도록 하는 서핑기술이다.
"누나, 처음 치고는 잘해. 거북이는 터틀롤 죽어. 하지만 누나는 살려." (인스트럭터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는 웃으며 엄지를 세우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터틀롤을 할 만큼 커다란 파도를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터틀롤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그의 말에 살짝 겁이 났다.
이 날도 어김없이 비가 왔다. 다행히 번개나 천둥이 치지 않은 덕분에 서핑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해온 서핑은 화이트워터를 타는 것이었다. 해안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보이는데 이 파도를 화이트워터, 거품파도라고 한다. 그런데 라인업으로 나간다는 것은 이 부서지는 파도를 뚫고 파도가 치기 전인 조금 더 깊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저기, 라인업이야. 우리 파도 뚫고 저기까지 가야 해. 터틀롤 필요해 누나."
서퍼들이 줄줄이 줄지어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를 관찰하는 자리. 이 자리를 라인업이라고 한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우아하게 보드 위에 앉아 '한 사람에 한 파도'라는 약속을 지키며 차례차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안가에서 보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라인업까지 손을 노 삼아 저어 나가면 되고, 커다란 파도가 오면 몸을 뒤집는다.' 라인업에 다다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하지만 보드 위에 몸을 싣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할수록,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를 두고 멀어져 가는 인스트럭터가 얄미웠다. 마음 같아서는 나 좀 데리고 가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이미 그는 내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너무 멀리 가 있었다.
'아니, 누나라며! 그러면 누나를 좀 잘 챙겨야지!'
푸념해 봤자 소용없었다.
'어디 있지? 아, 저기다! 빨리 가자! 그래야 파도를 탈 수 있어!'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온 얼굴로 맞으며, 온화한 표정으로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그의 모습을 겨우 확인하고 방향을 잡았다. 아무리 손으로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에 머무는 듯했다. 저어도 저어도 제자리인 것 같아 힘이 빠지니 손으로 노를 젓기를 멈추고 고개도 자주 떨구었다.
그러다 빗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싶어 고개를 든 순간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파도가 눈앞에 와 있었다. 그제야 "패들아웃!"이라는 말이 들렸다. '패들아웃!'이 들리면 죽기 살기로 패들링을 해야 한다. 엄청나게 큰 파도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파도의 피크가 될 지점을 중심으로 사선 앞으로 패들링을 해야 커다란 파도에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내 눈앞에 파도가 와 있었다. 연습했던 터틀롤은 어디 가고 몸이 얼어버렸다. 패들링을 멈추자 보드도 움직임을 멈췄다. 성난 파도가 내 몸에 꽂힐 듯 사납게 낙하하는 순간 남편과 아이들이 생각났다. '정신 차려!' 머릿속에 번쩍 빛이 들었다.
"터틀롤!"
인스트럭터의 외침에 엉겁결에 터틀롤을 했지만, 순식간에 파도에 휘말리며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 살아서 갈 수 있을까? 나는 그냥, 그때 보드 위에서 쭉 나아갔던 그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을 뿐인데...., ' 10년만에 다시 찾은 발리에서의 서핑은 내가 상상하고 바랐던 서핑과 너무나도 달랐다. 팝업 자세를 연습한 만큼 파도를 잘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헉헉, "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파도가 지나갔다. 만신창이가 되어 보드 위에 몸을 올려 주변을 확인해 보니 한참 뒤로 밀려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라인업을 바라봤다. 내가 걱정되었는지 인스트럭터는 순식간에 내 눈앞에 와 있었다.
"누나. 터틀롤 숨 쉬는 거 중요해. 후, 흡~ 후, 흡~. 큰 파도 보이면 패들링 더 빨리 앞으로 해. 멈추지 말고 파도 가까이 더 앞으로 패들링 해."
"후, 흡~, 후, 흡~"
"빨리 못가. 괜찮아. 멈추지 말고 천천히 패들링해. 빨리 패들링 하다가 멈추면, 안 하고 있는 거랑 same, same! 저기까지는 내 리쉬(보드와 서퍼의 발목을 연결하는 생명줄) 잡고 와."
"천천히! 멈추지 말고!"
그의 말을 상기시키며 한 손으로는 그의 리쉬를(리쉬라 쓰고 생명줄이라 읽는다.)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패들링을 하며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하는 연습을 해보았다. 그의 말처럼, 잠시라도 패들링을 멈추면 뒤로 밀려났고 파도는 애써 라인업을 향해 나아간 거리보다 나를 더 뒤로 밀어냈다. 페이스를 조절하고, 시선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하며 나아갔다.
'오늘 파도를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라인업에 다다르는 방법을 배우는 날이기도 한 거야.'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에게 여유를 허락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라인업으로 패들링을 하는 동안 한 번 더 커다란 파도가 나를 삼키려 들었다. '파도야, 내가 너를 지나갈 수 있게 허락해 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가오는 커다란 파도에 눈을 떼지 않고 기도하며 앞으로 계속 패들링을 해 나갔다.
"앞으로! 패들 패들! 패들아웃! 터틀롤!"
파도가 나를 덮치기 직전, 숨을 고르고 파도를 향해 힘차게 마지막 패들링을 하며 파도의 보이지 않는 깊은 속살로 몸을 돌렸다.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지할 것은 직감뿐이었다.
'괜찮아. 지나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지나가는 파도가 아슬아슬 보드를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을 간질이며 말했다. 두려움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몸에 긴장이 풀렸다. 손가락 끝에 더 이상 파도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지 않자 다시 힘차게 몸을 돌렸다. 인생에서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커다란 파도를 만났다. 나에게 다가온 파도를 보며, '이쯤은 가볍게 넘지!' 자만했다가 부서지는 파도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를 발리로 이끌었던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맞서 부딪히며 넘어보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꼭 그 방법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끔은 몸을 돌려 깊이 침잠하는 것도 그 상황을 현명하게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푸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패들링을 이어갔다.
'고마워.'
해냈다는 마음보다 나에게 기꺼이 자신의 깊은 면을 내어준 파도가 고마웠다. 그렇게 터틀롤을 몇 번 하다 보니 나름 익숙해졌다. 여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은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안전한 속살을 기꺼이 허락해 준 파도의 또 다른 면에 몸을 맡겼다. 여러 파도의 깊은 내면을 만나고 난 다음, 결코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라인업에 다다랐다.
"Take your time, 누나."
그는 나의 첫 라인업 입성을 축하하며 잠시 쉬라고 말했다. 라인업에서 한 명, 두 명 파도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 보드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넘어지는 순간을 함께 아쉬워하고 멋있게 서핑하는 모습을 축하해 주었다.
"누나, 준비됐어?"
그가 나를 바라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자, 여기, 여기 누워."
그는 내 보드를 탕탕 치며 패들링을 시작하라고 말했다.
'아! 드디어 라인업에서 첫 파도를 타는 건가?' 기쁜 마음과 '중간에 빠지면 저기를 또 어떻게 돌아오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뒤섞여 흥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일어나는 거야. 패들, 패들, 아직 조금 더 패들, 세게 패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할 수 이는 최선의 팔놀림으로 호흡을 조절하며 패들링을 했다. 언제 '하나,'라는 소리가 들릴지 몰라 그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 푸시! 업!!!"
'아니, 하나 둘 셋 해준다며!!!' 당황했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푸시 업 자세를 드디어 해냈다.
"와!!!!!!!!! 꺄악!!!!!!!!"
내 생에 그렇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른 적이 있었을까? 온몸의 세포들이 신나서 소리를 지르는데도 빗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가 하다도 들리지 않았다.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껴. 기꺼이 나를 허락해 줘서 고마워'
굵은 빗방울이 내 마음을 껴안고 바다에게 말해주었다. 내 모습을 보던 크루가, "나현 씨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까지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함께 웃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 정말 너무 행복해서 수없이 터틀롤을 하며 기진맥진 라인업에 다다르기 위해 했던 고생을 까맣게 잊었다.
이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저 커다란 파도에 몸을 맡기리라.
기꺼이 파도의 속살을 만나리라. 좋아, 다시 가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자!
라인업으로 다다를 수 있는 채널(바닷길)을 향해 힘차게 패들링을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는 찰나의 순간이 자꾸만 저 험난한 파도를 뚫고 가게 만들었다. 힘들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패들링을 해 나갔다. 손놀림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나보다 늦게 출발한 크루들보다 자꾸만 뒤처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가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결국, 라인업에 가 닿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