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파도에게 배운 내려놓음의 용기
첫 서핑을 마치고 단디 연습도 했겠다, 이제 나의 파도를 만날 수 있는 순간을 기대하며 다음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 즈음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가 계속 쳤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아, 발리 신이시여! 제발 바다에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온갖 신을 동원하다 발리 신까지 동원하며 기도했다. 하지만 ‘오늘 서핑은 번개와 천둥 때문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문자가 한통 도착했다. 너무나 아쉬웠지만 일어난 시간이 아까워 숙소에서 팝업 연습을 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방바닥을 바다 삼아 파도를 타다 보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하늘이 맑아졌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으니까, 이제 파도를 탈 수 있겠지?'
한껏 부푼 마음으로 보드를 빌리러 바다로 향했다. 연습한 실력을 뽐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습한 공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꾸따 해변. 맑은 날씨와 다르게 해변은 심상치 않았다. 한 여름 태풍 때 볼 수 있을법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곳에서 '내가 과연 저 파도를 탈 깜냥이 되는가?'를 재보았다.
'발리에서의 하루하루가 귀한데 재고 따질게 어딨어? 우선 가보자!' 생각하며 보드를 렌털하고 바다로 풍덩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파도의 'ㅍ'도 탈 수 없었다. 열 발자국 나아가면, 파도가 나를 스무 발자국 뒤로 밀어냈다. 하얀 거품이라도 타보려고 보드 위에 몸을 올려도 파도 간 간격이 너무 짧아 보드 위에 몸을 올릴 틈이 없었다.
'이렇게 물러날 수 없지!' 이를 악 물고 어떻게든 파도를 타 보려 하면 할수록 힘은 빠지고, 그 자리에 속상함이 채워졌다.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바다 밖에 나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 말고도 험난한 파도를 타려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비치보이를 따라 처음 파도를 타는 사람 같았는데, 이미 저만치 가버린 비치보이를 따라가기 버거운 듯 보였다. 겨우 비치보이가 가 있는 자리까지 갔다가도 너무 힘이 강한 부서지는 파도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보드 위에 몸을 올리는 순간 기우뚱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아...., 나만 안 되는 게 아니구나. 오늘은 파도를 타기 힘들겠다.'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서핑을 해 보겠다는 욕심을 꾸따 해변에 내려놓고 숙소로 돌아왔다. 해변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10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났다. 숙소에서 훌훌 수영복을 벗어던지고 짠기와 아쉬움을 빨아낸 다음 널고 있는데, 옆방에서 같이 서핑캠프에 참여하는 분이 눈을 비비며 나오셨다.
"서핑하고 오셨어요? 오늘 천둥 번개 때문에 취소되었을 텐데?"
"아, 그래서 혼자 꾸따에 파도 타러 갔다가 짠물만 잔뜩 먹고 왔어요."
"이런 날은 그냥 푹 쉬는 게 나아요. 날이 좋고, 파도가 좋으면 두 타임도 타거든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체력을 아껴두는 거죠." 옆방 서퍼의 말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혹시 망고스틴 드실래요? 열대 과일이 진짜 싸서 여기 오면 항상 과일은 잔뜩 먹고 가요."
그가 내민 망고스틴을 갈라보니, 안에 뽀얀 속살이 나왔다.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그동안 냉동으로 먹어왔던 망고스틴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 느껴졌다.
"여기 조금만 걸어가면, 과일 파는 가게가 있어요. 내가 고른 망고도 껍질 까서 다 썰어주거든요. 여기 망고가 엄청 싸요. 혹시 망고 좋아하세요?"
묻는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니 그는 나에게 가게 위치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도에 가게 위치를 표시하는 도중에도, 건망고와 냉동망고 밖에 모르던 나의 입에 잔뜩 침이 고였다.
옆방 서퍼가 알려준 가게에 가 보니, 여러 과일이 많았다. 좋아하는 망고 앞에 서서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뭐가 잘 익은 망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망고를 사고 싶은데,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몰라서요. 뭐가 맛있나요?" 물어보니 하나를 골라주었다. "썰어주실 수 있나요?" 묻는 말에 바로 싱크대로 가서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망고를 썰어주었다. 하나 가득 담긴 망고가 6천 원 정도였다. 옆방 서퍼에게 나눠줄 망고스틴도 넉넉하게 담고 돌아오는 길에 딸기가 눈에 띄었다. 얼마인가 살펴보니 한국에서는 만 원도 안 할 딸기가 2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값싼 딸기가 발리에서는 비싼 값에 팔리고, 발리에서 값싼 망고가 한국에서는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서로 뒤바뀐 과일 값에는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이 담겨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베란다에서 테이블 위에 사 온 과일과 맥주 한 캔을 올려놓고 책을 펼쳤다. 입 한가득 망고스틴과 망고를 넣고 우물우물 거리며 떠오르는 글감을 기록했다. 입가에는 달콤함이, 손 끝에는 영감이, 마음에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여전히 바다 위에서 어떻게든 파도를 타겠다며 아등바등했다면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라도 되는 일이라면, 노력해 볼 수 있다. 파도 위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바람은 새벽부터 일어나 팝업자세를 연습하고, 서핑 영상을 찾아보고, 더 잘 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바다 컨디션은 하늘이 주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때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함도 필요하다. 안 될 일을 되게 만들겠다고 아등바등 속상해하다가, 그 사이 놓쳐버릴 행복이 아까우니 말이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파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려놓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그것이 아니어도 괜찮을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모험이다. 내 생에 가장 맛있는 망고스틴을 만났으니, 이번 모험은 꽤나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