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까 말까 고민한 서핑집업이 나를 살렸다

구속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브레이크였다

by 김나현 작가

'아, 아무래도 슈트를 가져가야 할까?'

발리의 우기기간 서핑캠프를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봐도, 전신 슈트까지는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걸친 옷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신혼여행에 가서 첫 서핑을 했을 때 겪었던 당혹스러운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에서의 첫 서핑은 행복한 기억을 가득 선물해 주었지만, 딱 한번 당혹스러움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신혼여행을 갔던 5월은 발리의 건기라서 그리 파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도에 래시가드 지퍼가 쭈욱 내려갔을 땐 나도, 굴라(신혼여행에서 서핑을 가르쳐준 비치보이)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안에 비키니를 입고 있어서 별 볼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굴라는 시선을 돌리며 “지퍼 잠가야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래시가드의 지퍼가 내려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부랴부랴 집업을 했다.



그런데 발리 우기의 큰 파도 앞에서 비키니를 입는다? 아마 실오라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내 몸뚱이를 어쩌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를 일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우기의 큰 파도에도 불구하고, 서핑을 잘하는 캠퍼분들은 예쁜 수영복을 입고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너무나, 아름답고 쉽게 서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하는 꿈을 잠시 꿔 보았더란다.) 애를 둘이나 낳은 아줌마가 뭐 무서울 게 있겠냐마는, 다른 이의 아름다운 서핑 경험도 중요하니 다른 건 몰라도 서핑 집업은 준비해야겠다 싶었다. 바닷물에 통돌이를 당해도 끄떡없는 지퍼를 가진 옷으로 말이다.



고민을 하며 여느 때와 같이 당근을 둘러보던 어느 날, ‘서핑집업’ 알림이 떴다. 네오프랜 소재의 래시가드인데 두껍지도 않고 얇지도 않은 데다가 색깔이며 디자인이며 모두 좋았다. 한 가지 걱정된 것은 사이즈였다. 95라고 적혀있지만 판매자가 적어놓은 내용을 보니 평소 95를 입는 본인도 조금 타이트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이즈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자, '그러면 문 밖에 내어놓을 테니 입어보시고 사실 거면 입금 주시고 아니면 그냥 두시면 돼요.'라고 판매자분의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약속한 날, 보기에도 살짝 작아 보이는 서핑집업을 입으며 ‘아...., 이거 작기는 작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주 작아서 안 맞는 건 아니고....,’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되었다. 아이들 물건을 살 때는 아깝지 않은 돈이 내가 필요한 걸 사려고 하니 돈 만원이 어찌 그리도 아깝던지, 몇 번을 입고 벗으며 고민하다 결국 서핑집업을 사 왔다. 약속한 금액을 송금해 드리며 감사히 입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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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때도 입고, 비가 안 와도 입어요

결과적으로 중고거래로 구매한 서핑집업이 나를 살렸다. 우기에 발리 서핑을 처음 경험하는 서핑 초보라면 더더욱 꼭꼭 필요한 게 서핑집업이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산 서핑집업은 우기의 거센 발리의 파도 속에서도 끄떡없이 나의 몸을 지켜주었고, 무엇보다 패들링(서핑보드에 누워서 손으로 노를 젓는 일, 서핑보드를 움직일 때 하는 동작이다.)을 할 때 몸을 단단하게 잡아줘서 수월하게 패들링을 할 수 있었다. 우기에는 조류의 영향으로 만조가 되는 새벽 시간에 서핑을 했기 때문에 살짝 으슬으슬 추울 때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지켜줬다. 조금 덜 말라도 쿰쿰한 냄새가 나거나 하는 것도 없어서, 사 오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만큼 매일매일 서핑집업을 입었다.






새벽마다 파도를 찾아 다녔던 날들

26살,

발리에서의 짧은 자유를 만끽했던 것을 끝으로 허니문 베이비를 임신했고 27살 엄마가 되었을 때, 내 삶에 딱 달라붙은 ‘아이’라는 존재가 행복에 겨우면서도 답답하기도 했다. 내 몸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꽉 붙잡고 있는 ‘엄마’라는 역할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당신은 결혼을 안 했으면, 아마 더 엄청난 사람이 되었을 것 같아."

여러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빴던 요즘, 함께 시간을 보낼 틈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투정인 듯 진심인 듯 남편이 말했다.

"아니야. 아마 그랬다면 나를 혹사시켜 가면서 까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했을 거야. 몸이 만신창이가 됐을걸?"

진짜 그랬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이 정도?!인데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물 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세상을 탐험하느라 온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은 나에게 꼭 필요한 브레이크 같은 존재다.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리지 않도록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게 해 준다.

이제는 안다. 마냥 우울해하고만 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엄마’라는 역할 덕분이라는 것을. 엄마가 된 덕분에 출간도 가능했고, 교사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다. '나'라는 사람이 이토록 '글쓰기'와 '성장하는 삶'을 사랑한다는 것도 엄마가 되고 정체기를 겪으며 알았다.


인생의 파도를 타면서, 타이트하고 답답하게 나를 꽉 잡고 있는 것들을 만날 때면 서핑집업을 떠올린다. 나를 한계로 밀어붙이는 이 상황이 한편으로는 나를 얼마나 더 성장하게 해 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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