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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IN Jun 01. 2022

제가 이직 생각은 없어서요

어느 날 갑자기 이직 제안이 왔다

적당한 회사의 네임밸류, 적당한 성과와 처우, 적당한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게 평온했다. 일에 대한 현타마저도 배부른 고민으로 여겨질 만큼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가끔 다른 회사의 공고를 찾아보긴 했으나, 그럴듯한 지원 동기가 없었다. '여기 일에 익숙해져서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요!' 같은 패기 넘치는 말을 하기엔 이미 안정적인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부서의 동기가 퇴사를 이야기할 때도, 여기 생활이 너무 안정적이라 1~2년은 더 있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때  한 플랫폼을 통해 타 회사의 리더에게 메시지가 왔다. 꼭 이직이 아니더라도 네트워킹 차원에서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이미 내 생활 패턴은 안정화에 모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 큰 감흥은 없었다. 매력적인 회사였지만 큰 불만도 없는데 이미 익숙하고 편해진 곳을 뒤로하고 갈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고민을 하다 며칠 뒤에 답장을 했다.


네트워킹 차원에서 한번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첫 시작은 업계의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궁금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며칠 뒤 약속 날이 다가왔고, 오후 반차를 쓰고 그 회사로 찾아갔다. 느낌이 이상했다. 회사 휴가를 쓰고 다른 회사를 간다니? 사주에도 없는 바람을 피우러 가는 사람 마냥 긴장됐다. 초대받은 곳에 들어서자마자 건물과 시설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놀랐다. 하지만 괜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회의실로 가서 운을 어떻게 띄워야 할지 고민이 됐다. 상대방도 꼭 이직 때문은 아니라곤 했지만, 이직과 네트워킹 중에서는 전자의 목적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면 나는 그 회사는 물론 이직 욕구조차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씀 드렸다.


저.. 근데 제가 이직 생각은 크게 없어서요.


순간 '얘 그럼 왜 온 거야?'라는 표정이 읽혔고, 그때부터 회사와 그분에 대한 이력과 비전의 나열이 이어졌다. 이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어필을 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했고, 충분히 매력적인 업무와 환경이었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에서는 '굳이'라는 두 글자가 떠다녔다. '좋긴 한데, 굳이 지금 회사를 떠날 이유가 있을까?'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구미가 확 당기진 않았지만, 끝에는 일단 인터뷰를 보고 처우 협의까지 해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했고 일주일 내로 경력 기술서를 보내드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이게 맞나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어쨌든 경력 채용 프로세스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큰 자산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업무를 정리해보고, 회사 안이 아닌 밖에서의 몸값을 알아보는 것도 시야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거라는 주변의 추천도 있었다. 그래서 한번 응해보기로 결심했다.




원래 포트폴리오는 틈틈이 정리했기 때문에, 사실 하루 이틀이면 경력 기술서가 뚝딱하고 완성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지와 프로젝트 위주인 포트폴리오와는 달리 경력 기술서는 숫자로 콤팩트하게 성과와 능력을 보여줘야 해서 전혀 다른 결이었다. 경력 채용 프로세스 경험의 끝은 어쨌든 '연봉'이다. 응하는 김에 능력을 제대로 보여줘서 높은 평가를 받고 싶었다. 그 시작이 경력 기술서이기 때문에 제대로 잘 쓰고 싶다는 심이 생겼다. 일주일 동안 퇴근 후의 시간을 경력 기술서에 쏟았다.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직무 강점은 무엇일까? 3년 반 동안의 일을 대표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어떤 갈까? 어떤 표현이 가장 나를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할까? 등 각종 질문이 이어졌다. 3년 반의 시간을 모두 반추하고, 프로젝트와 강점을 추리는 치열한 문답 후에야 경력 기술서의 첫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 뒤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데,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원래 좀 감정이 잘 요동치는 편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그간의 경험을 정리해하며 한 문장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와, 나 진짜 뭘 많이 했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이 이어졌다.


여기서 과연 뭘 더 할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일. 80%로만 일해도 나오는 성과. 그래도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그 속에서 이미 나태해져 버린 나. 한 발 자국 떨어져 본 일하는 나는 메일 쓰기 기계가 된 것처럼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미 표정은 없었으며 생기 없는 얼굴빛에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경력 기술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며 떠오른 생동감 있게 일하는 나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퍽 서글퍼졌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이 담겨 있는 경력 기술서를 한참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미 여기서 3년 반 동안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글쎄. 모르겠다.


1년 후에 이 페이지가 크게 달라질까?

그건 아닌 것 같다.

프로젝트 몇 개정도는 더 추가되겠지만, 그 안에 성장은 없을 것 같다.


1인칭 시점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3년 반 동안 먼저 제안해서 시작과 끝을 본 프로젝트도 여럿 있었고, 새로운 BM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었다. 예전이면 회사 안에서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프게도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보통은 이직을 결심하고 경력 기술서를 쓰지만, 반대로 나는 경력 기술서를 쓰면서 이직에 대한 본격 고민이 시작됐다. 지금 해온 일을 정리하자, 내 상태가 명확히 진단되었고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단 경각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혼란의 시작이라고만 생각했지, 이직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없었다. 여전히 너무 편하고 좋은 곳을 져버릴 용기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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