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가 이직을 생각할 때,
퇴사할 문제란 없었다. 적당한 회사의 네임밸류, 적당한 성과와 처우, 적당한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게 평온했다. 워라밸을 딱히 추구한 적은 없지만, 거의 4년 동안 야근을 한 건 한 손 안에 꼽을 정도였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회사 안팎으로 나의 것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회사에서 느끼고 싶었던 게
안정감이었나?
어느 순간 회사의 장점으로 '워라밸'을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 하고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칼퇴가 가능한 직장에 다녀야만 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직장생활이었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안정감은 가장 후순위의 조건이었다.
흔히들 안정적인 직업으로 이야기하는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모두 매력적이지 않았다. 신입부터 회사에서 진취적으로 의견을 내고, 원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에서 하하호호 열정 가득 일하고 싶었다. 스타트업도 규모와 업종에 따라 분위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네 번의 인턴을 거친 뒤 심사숙고 끝에 첫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모든 게 좋고 즐거워서 애정을 듬뿍 쏟았다. 입사를 원했던 회사, 처음 경험해봤지만 월요일이 기다려질 만큼 재미있었던 업무, 같이 있으면 즐거운 동료들과 함께 였다. 평소에는 파워 I에 트리플 A형이지만 일할 때만큼은 오지라퍼였다. 유관부서에서 팀 전체에 업무 협조를 요청하는 메일이 오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가장 먼저 확인해 문제를 해결했다. 팀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거리낌 없이 손을 들고, 아이디어가 생기면 팀 전체에 제안을 해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다.
여러 번 인턴을 했던 덕에 나름의 '잘 맞는다'라는 기준이 생겼는데, 기업, 조직문화, 업무, 동료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1년을 꽉 채웠을 때,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지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때 후-하-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갑자기 머릿속의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동료분들 사이의 연차와 연봉 대비 일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서부터 혼란은 시작됐다. 내 인생에 인적성 검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친구들이 공부하던 모습을 복기하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돈 따질 거면,
나도 대기업 준비를 하는 게 맞았을까?
돈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스타트업 취업을 결심한 거였는데 현타가 왔다.
그 후 2~3년 차가 되었을 땐 연차가 더 높은 분들보다 많은 일을 소화하게 됐다. 가끔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이런 모습 또한 스스로 싫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나'에게만 집중하기로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갔다. 그러다 먼저 제안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팀 전체에서 처음 하는 유형이라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일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파트너사, 유관부서의 중간 소통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새로움을 겪어나가는 과정이 좋아 어찌어찌 해나가던 찰나, 어떤 분께서 말씀하셨다.
00님이 그거 한다고 했을 때,
젊은이의 패기라고 생각했어요.
머리가 띵해졌다. 아, 내가 하는 일들은 누군가는 '패기'라고 생각하는구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일을 좋아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어차피 결국 한낱 직장인이면서 도대체 뭐 그리 대단한 걸 원하고 있었던 걸까? 그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일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래 100%의 에너지로 일을 했다면, 힘을 빼고 80%로 일해보았다. 이미 업무에 숙련되었기 때문에 80%로만 일해도 120%의 성과가 났다. 여기서 120%의 에너지로 일을 했다면, 그 이상의 성과가 났겠지만 더 이상 그런 욕심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적당한 상태로 일했다. 너무 열정적이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상태.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서 얻은 '억울함'이란 감정 끝에 미지근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후 아이러니하게도 성과는 좋아 높은 연봉 인상률과 인센티브를 받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연봉 대비 효율성은 높아진 직장형 인간이 됐지만, 예전만큼의 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직업형 인간은 사라져 갔다. 이제 내년에는 무얼 하면 또 이 정도의 성과를 인정받겠구나가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럼 또 일정 부분 이상으로 일하는 건 손해이고, 어느 정도 일해야 될지 대략 계산이 됐다. 한번 돌기 시작한 계산기는 쉽게 멈추지 않았고, 이렇게 흔한 직장인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일해도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00에 다닌다고 하면 업계에서 알아줬으니까. 상사 스트레스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때론 문제가 없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