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이 회사를 사랑했던 이유
팀장님께 퇴사를 말하기 하루 전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펑펑 울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이기 딱이었다.
휴가를 내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가는 길 바람피우는 기분이 들었다면, 내가 첫 회사와 했던 건 연애였을까? 이직을 결심하고 나서 퇴사를 말하기 전에는 오랜 인연과 이별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의 마음이 변색된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지루함의 반복 끝에 이내 이별을 결심한다. 하지만 막상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된다고 하니, 지난 세월이 아련하기도, 무색하기도,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다. 내가 첫 회사와 했던 건 연애였나 보다.
사실 오래전부터 A사는 내게 연모의 대상이었다. 대학생 시절 대외활동 면접을 가서 가고 싶은 회사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외쳤던 회사는 S전자도, N포털사도, K IT사도 아닌 A사였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본 여덟 학번 차이가 나는 학과 선배가 다니던 회사였다. 작은 스타트업이었지만 선배의 매일이 즐거워 보였다. 그때부터 A사와 스타트업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어쩌면 환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스타트업 업계에서 몇 번 인턴 생활을 하다 덜컥 A사에 정말 취직하고야 말았다.
대학생 때 준비하던 직무도 아니었고, 보통 신입을 뽑는 포지션도 아니었지만 단순히 A사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한 거였다. 대신 원래 해오던 분야에서 핏할 수 있는 경험들을 뽑아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준비했었고, 대학생활 동안 쉬지 않고 대외활동과 인턴을 해온 덕분에 정규직 전환형 인턴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A사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직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재미있었다.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주말에도 월요일이 기다려졌고, 이런 일을 돈 받고 할 수 있음에 감사해졌을 정도였다.
인턴 기간 동안 좋아하는 일은 잘하는 일이 되었고, 감사히 좋은 평가를 받아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다. 그렇게 3년 7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자율과 책임이 공존하는 업무 환경에 잘 맞아서 조직과 직무에도 빠르게 적응했고, 저연차였음에도 부서의 메인 프로젝트 PM으로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회사도 대외적으로 주목받던 시기여서, 나도 회사도 동시에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와 상사분을 만나 역량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음에 행복했다.
00님은 이 직무가 정말 천직인 것 같아요.
00님이 우리 회사에 와서 너무 좋아요.
이 연차에 이렇게 일 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자기 효능감이 중요한 사람이기에 업무적으로 인정받는 경험 하나로도 회사와 사랑에 빠질 이유로 충분했다. 거기다가 사랑의 짝대기가 더 이상 일방향이 아니었기에 감정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이 쌍방이 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 상대가 회사라면? 극히 드문 케이스였기에 애사심은 나날이 깊어져 갔다.
하지만 회사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도 직장인 369법칙은 비껴가지 않고 그대로 찾아왔다. 딱 3년 차가 되었을 때부터 권태기가 간헐적으로 반복됐다. 1~2년 차 때 가파르게 성장했기 때문에 3년 차가 됐을 때 성장 속도가 더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취 중독에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딘 성장은 곧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그냥 나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었기 때문일까.
회사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가 봐.
이따금씩 처음 경험해보는 케이스의 프로젝트를 맡게 될 때면 다시 이전의 감정이 올라왔지만 잠시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주말만 기다리게 되고, 가끔 동태 눈깔이 될 때면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예전에 얼마나 재미있게, 또 진심으로 일해왔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해버린 나 자신이 싫었다. 영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되지 않을 거라며 다짐했건만, 그냥 직장인 1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럼에도 퇴사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건 배부른 고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랜 연인에게 통상적으로 하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도 있지 않은가. 딱 그랬다. 어쨌든 성장하고 있는 회사, 잘 맞는 조직문화, 보상으로 이어지는 업무 성과 등을 져버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원래 연차가 쌓이면 다 이렇게 되는 거 아닐까? 여기만큼 나답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주는 상사를 만난 건 정말 천운이 아닐까? 퇴사하면 100% 후회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미 회사는 너무 편하고 안정적인 존재였다. 오래된 침대에 몸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