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없는 술자리

형 저녁 잘 먹었어요. 조심히 들어가고요.

by 생각하는냥

술자리를 파하고 사정이 있어 한 잔 술 마시지 않았지만 귀가하는 길에 바라본 세상은 한 잔 술 걸친 것처럼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 매일 보던 길인데도 더 이뻐 보이는 건 왜일까.


술자리에는 실직한 사람, 월급이 밀린 사람,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 셋이 모였다. 셋은 전 직장 동료다. 각자 한 살 차이지만 그래도 형, 형 하면서 꼬박꼬박 대우를 해주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자리가 좋았던지라 평범한 직장인은 얼결에 떠밀려 술을 사기로 했으면서도 전혀 아깝지 않아 한다.


실직한 이는 실업수당을 타고 있다는 이유로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한다며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월급이 밀린다는 이는 마이너스 통장이지만 다음 달이면 부장으로 진급할 것 같다며 곧 나올 월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이번 달 말에는 자기가 쏘겠다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은 그래도 월급 잘 나오는 게 어디냐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 알코올은 패스다.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애꿎은 조개만 원 없이 씹어댔다.


서로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동창을 만나기라도 한 듯 편하다. 그런 덕에 가끔은 어디서도 하기 어려운 19금도 서슴없이 나오곤 한다.


월화수목금 요일별로 여자 친구가 있다는 화성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데이트 첫날부터 남자 친구를 덮쳤다는 금성인의 이야기가 어우러졌다. 금성인의 남자 친구는 매일 백 미터 달리기를 수차례 달려야 하다 보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국 두 달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자의 바람둥이인 남자와 후자의 금성인이 만났더라면 환상의 조합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인연이라는 건 논리적으로 맞을 것 같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긴 하다.


실직을 했어도 월급이 밀렸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건 그들에게 각자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리라. 계획대로 세상일이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이미 뽑은 칼이다. 뽑아진 칼은 하다못해 무라도 자르게 되어 있다. 더러는 얼결에 나라를 구할 칼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이 탓에 직급 탓에 어느덧 회사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렸지만 "형 저녁 잘 먹었어요. 조심히 들어가고요"라는 그들의 톡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밤이다. 그래서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술 몇 잔은 들이켠 듯 밤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이 어찌 꽃길만 걸으리오. 꽃길을 가든 자갈밭을 거닐던 방향만 잃지 말고 내 갈길 걸어가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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