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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Mar 18. 2023

사대마왕

오한, 두통, 발열, 근육통

꽃샘추위가 시작되던 날, 문득 반갑지 않은 이가 찾아왔다.

'몸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던졌다.

'풍덩'.

따뜻한 옷과 이불을 준비하고 적정 온도의 전기장판을 틀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 정도의 방어선이라면 몸살쯤이야 초반에 잡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세상 일이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오한, 두통, 발열, 근육통 사대마왕의 물량 공세에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새벽이 이렇게도 길고 길었나.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병원을 찾았다. 출근은 해야겠고 병원은 가야겠고,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병원으로 평소에 가던 곳이 아닌 지하철역 가까운 병원으로 말없이 흐느적거리며 진격의 걸음으로.


느려터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열을 제보자 한다. 38


독감검사를 하는데 검사비가 3만 원이란다. 동네 병원은 2만 5천 원이었는데 역 근처라서 부동산도 비싸고 검사비도 비싼 건가. 발길을 돌리기엔 사대마왕 때문에 힘들었다. 간호사 언니들이 이뻐서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의심하지 마.'


그래도 3만 원짜리 검사니 차라리 독감이길 바랐다.

그러나 <꽝>, '내 삼만 원'은 날개를 타고 훨훨 날아가 버렸다.

힘이 드는 건 삼만 원 때문일까, 아니면 사대마왕 때문일까.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속상함을 달래주려든 듯 의사는 친절하게도 소꿉장난의 의사처럼 이곳저곳을 봐주었다. 목이 부었는지 배가 아프지는 않은지 청진기 놀이를 어찌나 잘해주든지. 그런데 약간 서운한 건 청진기를 좀 더 오래 들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자마자 바로 뗐다. 내가 음치인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바로 떼면 좀 많이 서운하잖아.


딱히 원인은 모르겠으니 약을 먹어보고도 아프면 바로 병원으로 다시 오란다. 나는 좋다. 이쁜 간호사 언니들이, 아차차, 간호사 때문에 이 병원이 좋은 건 아니다.


회사는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아 재꼈다.

'저 아파요.' 전화 한 통으로 배 째라고 우기고 집으로 회군하였다.


약을 먹고 한 숨 자고 나니 몸이 좀 나아지는 것 같더니 없던 가슴 통증이 생겼다. 갸우뚱. 심한 건 아니라서 약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겠지 싶었다.


저녁이 되니 좀 괜찮아지나 싶었다. 나아지나 싶었다. 그러나 도둑도 적군도 술 취한 남자들도 새벽에 찾아오듯 그렇게 사대마왕도 새벽이 되니 다시 자기 집 앞마당인 것처럼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코로난가?


다시 또 기나긴 새벽을 보내고 다음날 겨우겨우 옷을 챙겨 입어 병원으로 기어가듯 꿈틀거리며 겨우 도착하여 열을 재니 38.4.


코로나 검사나 독감 검사나 똑같이 콧구멍 안쪽 깊숙이 면봉을 후비는데 전날은 따끔했던 것이 벌써 익숙해졌는지. '더 깊게 넣어도 되는데'라는 이상한 생각을 그 와중에.


의사에게 물었다.


"혹시 대상포진은 아닐까요?"

"수포가 없잖아요."

"수포가 없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대상포진은 열이 안 나요."

"그럼 뭐죠?"

"누워 볼래요?"


또다시 의사소꿉놀이가 시작되었다. 배를 꾹꾹 눌러대며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


"장이 안 좋은 거 같긴 하네요."


역시나 원인은 모르겠으니 항생제 처방을 해주면서 그래도 아프면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독감도 아니고 코로나도 아닌데 원인은 모르겠는 아픔이면 혹시 상사병인가? 


여전히 아픈 표정으로 대기실에 앉아 처방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쁜 간호사, 아차차, 그냥 간호사가 구석에 있는 방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헛 게 보이나? 마스크를 썼지만 웃으며 부르는 것 같다.


모른 척 순순히 따라 들어가니 한 손엔 뾰족한 바늘이 달린 주사기를 들고 명령한다.

"주사 맞겠습니다."

"팔뚝인가요, 엉덩인가요?"

"엉덩이요."

'네 알겠습니다.'


바지를 내리려는 순간 깨달았다. 몸이 워낙 아프다 보니 편한 속옷을 입는다고 트렁크를 입고 온 것을. 많고 많은 날 트렁크를 입은 날 주사를 맞게 될 줄 생각이나 했을까. 티 안 나게 바지로 속옷을 애써 가리며 내리긴 했는데 봤으려나?


"따끔합니다. 따끔."


엉덩이보다 마음이 더 따끔거렸다. '저 오늘도 아파요.' 더불어 회사를 또 제치고 집으로 가 풀썩 쓰러졌다.


그런데 일하는 것보다 아파도 집에서 쉬는 게 더 좋은 나는 게으른 소가 맞는 것 같다. 소띠라서 소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다. 화낼 땐 성난 소 같다고, 웃을 땐 웃는 소 같다고, 게으를 땐 게으른 소 같다고. 소띠라고 막 가져다 붙이는 거 같지만 그중에서 게으른 소가 너무 좋다.


어렸을 때 ebs에서 했던 프랑스 흑백영화 중에 한 시골농부를 거의 머슴처럼 부리는 장인과 아내가 있었다. 어느 날 장인과 아내가 차를 타고 나가니 시골농부는 가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날렸고 어이없게도 정말 그날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그동안 밀렸던 게으름을 뱉어놓았다. 그러다가 게으른 또 다른 여자와 만나 결혼도 하는 그런 영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 영화 제목은 왜 생각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Chat gpt에게 물어봐도 헛소리만 늘어놓기만 해서 찾다가 포기했다.


아니 그러니까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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