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살던 집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 밤만 되면 그 대나무 숲은 전설의 고향에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람 불 때면 댓잎끼리 서로 부딪치면서 나는 '쏴-'하는 소리는 어둠 속에 미지의 존재가 있을 것 같은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지금은 어두운 마당에서 바람 소리를 들을 일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가 들려준 공포 채널의 이야기도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기만 했다. 또는 너무 창작이 과하다고 생각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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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혼자 화장실 가는 것을 싫어했다. 화장실의 변기나 하수구에 괴물이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물이 내려가면서 괴물에게 삼켜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반면 나에게 하수구는 그저 오물이 흘러가는 통로일 뿐이다. 하수구를 단지 하수구로 인식하면서 편하게 화장실을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빚어낸 상상력을 누릴 수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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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많이 알게 된다.
하지만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더 용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대나무 숲을 날아다니는 귀신이나 화장실 괴물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
삶에는 알 수 없어서 무서운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