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02 -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시작
새벽에 도착한 바쿠는 숙소에서 잠시 쉬고 있는 데도 너무 일찍 도착해서 인지 아침 8시를 갓 지나고 있었다. 여독을 푼다고 계속 호텔에서만 있으면 축 쳐질 것만 같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구시가지 차리 샤하르를 돌아보기 위해 지도 한 장을 들고 숙소를 나섰다. 너무 호기로웠나 보다. 너무 이른 아침인지라 문을 연 상점도 없었다.
바쿠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는 메이든 탑 쉬리반 샤호프칸 궁전은 아직 오픈전일 것 같아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구경하면서 가다 보면 얼추 시간이 될 것 같아 가보기로 했다. 시가지를 들어서면서부터 보이는 것은 파란 계통의 색과 문양과 조각으로 이루어진 건물들과 조각상들...
'처녀의 망루'라 불리는 메이든 탑 쉬리반 샤호프칸 궁전,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잠깐이었고 , 정문에 도착했으나 예상대로 문이 굳건하게 닫혀있었다.
오픈 시간은 오전 9시, 아직 오픈 30분 전이었다. 계단에 걸터앉아 오픈을 기다리고 있으니 햇볕은 갈수록 강렬해지고 눈은 부셔서 선글라스 없이는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벽 그늘에 앉아 아무 의미 없이 이곳저곳에 셔터를 눌러대다 보니 어느새 관리원이 나와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쉬리반 샤호프칸 궁전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라 불리며, 모스크, 회의장, 영묘 등 잘 어우러져 왕궁 전체가 조화를 잘 이룬다. 현재 궁전의 부분은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슬람권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글자체가 내 눈을 '확'사로잡았다. 벽 상단과 천정으로 이어지는 새겨진 조각그림도 뜻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알아볼 수 없는 내가 아쉬울 뿐...
어떤 책자에 보면 이곳은 배화교 아테쉬카(조로아스터) 사원이라고도 한다.
건물 외부로 나오면 건물 벽면에 조각난 문양들을 걸어놓은 곳이 보인다. 글자 같기도 하고 문양 같기도 한 것이 우리네 기와를 걸어놓은 듯 건물 벽면을 따라 쭉 늘어서 있다. 다른 건물로 돌아서면 왕의 부인들이 즐겼던 온천 목욕탕이 나온다. 왕족이 위에서 목욕한 물을 아래로 흐르게 해서 시녀들이 물을 받아 목욕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때도 왕족, 귀족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나 보다.
메이든 타워로 걷다 보면 여러 개의 골목이 보인다. 그중 '저건 뭐지?' 하면서 자세히 보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진짜인가?', ' 아닌가??' 밖을 내다보는 사람의 그림만 없었다면 그림인 걸 모르고 골목을 따라갈 수 도 있을 정도로 자세히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면 속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을 돌아 돌아 내려오다 보면 어느 지점에 이르러 시야가 확 트이면서 조망이 좋은 곳이 나온다. 그곳에서 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여성의 모습 자체가 그림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여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여성도 쑥스러운지 사진 찍는 내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보였다.
차리 샤하르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래쪽 한가운데는 유적을 전시하는 것 같은데 위쪽으로는 카페의 좌석이 둘러져 있다. 유적과 함께하는 색다른 풍경!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하다.
드디어 메이든 타워 앞에 도착했다. 벽 두께가 무려 5m, 높이 28m에 이르는 바쿠 메이든 타워,
이곳에 올라 차리 샤하르를 볼 것이다. 그러나, 높은 곳은 올라가기가 힘들다고 했던가?...
좁고 어두운 계단을 힘겹게 올라간 메이든 타워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바쿠의 시내가 360도로 펼쳐 보였다. 카스피해의 최대 항구도시임을 뽐내듯이 바닷가에는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처럼 보이는 건물도 보이고, 반대편인 시가지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랜드마크인 '불꽃 타워'도 보인다. 아제르바이잔의 랜드마트 '불꽃 타워'는 관공서 건물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의 나라처럼 빌딩 모습을 불꽃으로 표현하였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시티 마켓'을 빼놓을 수 없다.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다짜고짜 외쳤다.
빅 바자르~, 고! 고! 빅 바자르~
택시 기사는 다행히 알아들었고 '야실 바자르'를 외치면서 데려다주었다. 어느 건물 앞에 내려준 택시기사는 말끔한 건물을 가리키면서 '야실 바자르'를 외치면서 떠나버렸고 야외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도 건물을 보는 순간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상당히 컸고 입구에서 보면 쇼핑몰의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들어서고 보니 이곳에서는 야채만 팔고 있었다. 즉, 야채를 파는 바자르였던 것이다. 천정은 높아서 시야를 확 트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가지런하게 진열되어있는 과일들은 깔끔해 보여서 그런지 더 맛있어 보였다.
시장이니 '먹을 곳 하나 없을까'하는 생각으로 구석을 찾아 들어갔다. 건물 사면의 구석을 찾아다니다 보니 한쪽에서 아낙네들이 직접 빵을 구워 파는 식당이 있었다. 내부에서 앉아 먹을 수 있는 공간과 테이블도 없는 걸 보니 식당은 아닌듯해 보였다. 이곳은 당연히 영어가 통하질 않았고, 우리 중에는 러시아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몸짓, 손짓으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지를 문의했고 가게 주인은 알아들은 듯이 가게 앞, 시장 바닥에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앉으라고 하였다.
구운 닭과 함께 화덕에서 직접 구운 '초레크'라는 빵을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초레크는 우리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화덕에서 직접 구워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닭이 있으면 맥주가 있어야 하는 지라 맥주를 함께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한다. 옆에 구멍가게처럼 보이는 같은 가게가 보인다. 설마 슈퍼에 맥주가 없겠냐는 생각으로 들어가서 물어보니 없단다... 건너편에 가게 앞에 냉장고에 파란색 병이 보인다. 들어가서 '비어', '비어' 하고 외치니 가게 주인이 냉장고에서 파란 병의 음료를 꺼내서 보여준다.
하**켄과 같은 파란색 병을 들고 좋다고 웃으면서 탁자로 가져왔다. 탁자에 초레크와 구운 닭이 세팅되고 시원하게 한잔 하자면서 파란색 병의 음료를 따르니 기포와 거품이 올라오면서 먹음직스럽다. 이 곳에 와서 처음 마시는 맥주, 건배를 외치며 한 모금 들이마신 음료는...
AC~ 이게 뭐야?? 탄산수??....
깜박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문화권이라 술을 파는 곳이 드물다는 것을~~
너무 기대를 한 탓인지, 탄산수로는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초레크의 맛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후에도 그렇게 맛있는 초레크는 못 먹어봤다.
'블바르 파르크'는 비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있는데, 그 언덕에 오르면 카스피해와 바쿠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 '꺼지지 않는 불'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단순히 잘 정돈된 공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정돈된 한쪽으로 까만 비석과 묘지 석판이 많아 공동묘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분위기가 사뭇 엄숙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까만 비석에는 하나같이 사진과 함께 출생~사망일까지 표시되어있었고,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을 보고는 단순한 공동묘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9세기 초 러시아에게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당한 아제르바이잔은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틈을 타 1918년 5월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20년 적색 러시아군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이 블바르 파르크는 러시아 침공 시 저항하다 희생당한 희생자의 무덤과 추모탑이 있는 곳이었다. 추모탑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남일 같지 않은 슬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 위인들이 있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거라 생각하니 나라의 독립에 애썼던 이름 모를 위인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다시 찾은 바쿠의 구시가지 '차리 사하르'는 낮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상인들도 더운 낮보다는 선선한 기운이 되는 오후 쯤되어서야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메이든 타워를 중심으로 구 시가지의 골목골목에는 좌판을 펼치면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눈으로만 볼 수 없다. 자주 접하는 물건들이 아닌 만큼 만져보기도 하고 써보기도 하고 입어보기도 한다.
상인들이 가지고 나온 물건들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지니 요정이 나올만한 램프라던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이 신고 다닐 것 같은 신발, 마법사가 타고 다닐 것 같은 양탄자까지 너무나도 페르시아스러운 것들로 가득했다.
상인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카페나 식당의 조명도 켜지면서 골목에 있는 벽화나 장식된 나무들이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나무에 저렇게 장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발한 생각에 박수를 보낸다.
벽화에 스토리를 잡으면서 사진도 찍고 나무에 숨바꼭질도 하면서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