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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Oct 11. 2022

마음을 나눈다는 것

보호자분께 배우다



  우리 집에는 애교쟁이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두 녀석 모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나와 실제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셋째 고양이가 있다. 루팡이. 밤하늘처럼 까만 몸에 코 주변과 발끝만 하얀, 이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외모의 루팡이가 내 마음속 깊이 들어온 연유는 참 슬픈 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루팡이 와의 첫 만남


  두 손안에 쏘옥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아기 고양이 루팡이가 처음 병원에 온 이유는 중성화 수술과 목덜미에 잡히는 작은 몽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난이도가 높은 수술은 아니었으나 목덜미 몽우리를 제거한 자리에 실밥이 있다 보니, 뒷발로 자꾸 수술한 부분을 긁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위치가 목덜미이다 보니 뒷다리를 못쓰게 하지 않는 이상 술부를 보호할 방법이 없어 실밥을 뽑는 날까지 뒷발 끝에 붕대를 감아 놓기로 했다. 바로 퇴원도 가능했지만 보호자분 사정으로 5일 정도 병원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입원이 진행되었다.


  루팡이는 정말 활발하고 착한 고양이었다.

  혼자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하며 좁은 입원장을 운동장처럼 이용하며 깨방정을 떨기도 하고 무엇을 주던지 주는 대로 잘 먹고 졸리면 느닷없이 잠드는 앙증맞은 아기 고양이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며칠이 지나 나의 휴무날이 돌아왔고, 루팡이는 부 주치의 선생님께 인계해드리고 이틀간 쉬고 돌아와서 루팡이의 상태를 보니, 겉보기에 술부도 멀쩡하고 별 탈이 없으니 이대로 퇴원을 진행하면 되겠다 싶어, 뒷다리에 감아두었던 붕대를 풀어주었다.

  "그동안 답답했지? 이제 실컷 뛰어놀아!"




  큰일 났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며 루팡이 입원장 안에 깔려있는 패드에 자꾸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묻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서 묻어나는가 싶어 살펴보니 붕대를 감았던 발 중에 하나에서 체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쉬러 간 사이, 발에서 붕대가 자꾸 빠지니 누군가가 약간 압력을 가해서 붕대를 다시 해주신 것 같았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압력에 의해 발에 혈액순환이 되지 않은지 만 하루 이상이 지난 것이다.

  쿵 내려앉은 심장으로 하루 종일 수시로 처치실 바닥에 앉아 루팡이의 발을 마사지해주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루팡이의 발은 정상으로 돌아와 주지 않았다.


  자, 이제 이 상황을 보호자분께 어떻게 설명드릴 것인가. 눈앞에 캄캄했다.

  욕을 하시면 들어야지. 소리를 지르시고 원망을 하셔도 당연한 거지. 어쩌면 찾아와서 때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단단히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송신음이 들리는 와중에도 나는 세상이 이대로 무너져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호자분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나는 상황을 설명드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해드리겠다고, 죄송하다고....

  내가 그때 보호자분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 같다. 이성을 잃고 화내고 소리 질렀을 것 같다. 머리끝까지 화가 날 상황이 분명했는데 보호자분께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일단 알았다고, 최선을 해 달라고 말씀하시며 상황을 받아들이셨다.

  보호자 분과 전화를 끊고 나는 달아올랐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날이 선 날카로운 말들이 아닌, 차분한 말투와 안정된 자세가 오히려 나를 더 자극했다. 어떻게든 루팡이에게 최선이 될 선택을 하리라 다짐했다. 




  기나긴 싸움의 시작 그리고 세 번의 수술


  그 이후로 며칠간 루팡이의 발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발가락 사이가 벌어졌고 색깔은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부기가 모두 빠지고 피부가 소가죽처럼 쪼글쪼글 말라붙어 미라화 되었다.

  수의사이지만 이런 상황을 실제로는 처음 겪어보는 나로서는 쪼그라든 발을 처음 보고 거의 일반인처럼 충격을 받았다. 부기가 가라앉으면서 그냥 정상화되길 바랬던 나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루팡이의 발에 붙어있던 조직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하고 고목나무 껍질처럼 변해버렸던 것이다.


  이후 루팡이와 나는 함께 기나긴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고목나무 껍질처럼 변해버린 피부를 발가락 부분을 제외하고 벗겨내는 1차 수술 이후, 2번에 걸쳐 발등에 피부 이식 수술을 진행했고 (우측 옆구리에서 한번, 좌측 옆구리에서 한번 피부 채취를 했다) 그렇게 세 번의 수술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이 되었다.


  수술 후 이식 피부 조각이 얼마나 붙어 있어 줄지. 루팡이가 느낄 통증이 어느 정도일지, 약을 계속 먹이면서 약 때문에 설사가 시작되진 않을지 루팡이 입원장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보호자분께서는 놀랄 만큼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버텨주시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은 회사에서 회식자리가 있으셨는지, 약간 취하신 상태로 통화 중에 우신 적이 있다. 그동안 얼마나 꾹 꾹 눌러 참고 계셨을까. 걱정을 표현하시더라도 이성적으로 누르며 말씀하시던 분이 우시던 작은 소리는 그 어떤 원망과 비난의 소리보다도 나를 깊게 아프게 했다.


  



  너를 사랑하게 되었어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아직 아기인 루팡이가 한창 뛰어놀고 싶을 때 입원장 안에 하루 종일 갇혀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뛰어다니고 싶을 텐데 입원장은 많이 좁을 테지, 그루밍을 하고 싶을 텐데 (그루밍 : 고양잇과 동물들이 스스로를 핥아 몸 단장을 하는 습성) 발을 보호하느라 해둔 넥 카라가 엄청 답답할 테지.

  나는 진료 사이사이에 시간만 나면 진료실로 루팡이를 데리고 들어가 진료실 안에서라도 뛰어놀 수 있게 해 주고, 루팡이가 발 빼고 다른 곳은 그루밍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보호자 분도 루팡이의 평소 모습을 보고 싶으실 거라 동영상을 찍어 보내드리기도 했다.

  

  이런 내 행동은 수의사로서 꼭 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긴 치료 기간 동안 루팡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했던 행동들이었다.

  루팡이는 피부가 완전히 벗겨져 인대가 드러난 발에 소독제를 붓거나 붕대를 감았다 벗겼다 하는 자극이 가해져도 하악질을 하며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꾸욱 참고 끼잉 하는 소리만 내는 게 전부였다. 루팡이의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며 '아프지... 미안해..'라고 하면 마치 '이해해줄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사실 나를 엄청 미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한없이 착하고 천진한 루팡이의 성격이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었고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무거운 상담


  2차 피부이식까지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발가락을 살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로 외과 선생님과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고 방법을 강구했지만 발가락 인대를 살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수술을 들어가서, 죽은 피부를 완전히 제거해 보았을 때, 안쪽으로 새 살이 차오를 기미가 없다면 발가락을 절단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발가락 부분만 절단하여 뭉툭한 발을 갖게 된다면 걸을 때 발끝이 바닥에 쓸리게 되고 지속적으로 피가 나고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발을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허벅지 중간 정도의 높이에서 절단해내어 다리가 바닥에 아예 닿지 않게 해 준다.

  루팡이의 다리를 허벅지 부분에서 아예 절단하자고 하는 것이 루팡이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는 방법일까? 아니면 한번 더 욕심을 부려서 발끝만 절단하고 뭉툭한 발 끝에 잘 적응해 주는지 먼저 보는 것이 맞을까? 이제 보호자 분과 마지막 중요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상담을 나누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루팡이의 보호자분은 여기까지 놀랄 만큼 잘 받아들이고 따라와 주셨다. 나중에 나에게 솔직히 말씀해주시기를, 사실 다른 병원으로 가서 치료할 생각도 했는데 다른 병원으로 가면 선생님처럼 이렇게 최선을 해주지 않고 처음부터 다리 자르자고 할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고, 선생님이 루팡이를 대해 주시는 게 정말 진심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믿고 맡겼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난생처음 느껴보는 뭉클한 감정이 생겼다. 나의 진심이 어떻게든 보호자분께 가 닿은 것 같아 코 끝이 찡해왔다.


  발가락 절단을 할지 다리를 절단할지를 두고 보호자 분과 진료실에서 상담이 이루어졌다. 퇴근 후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여 병원에 와주셨고 밖에는 나의 마음처럼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발을 살려내기 위해 함께 노력해왔는데 결국에는 발 끝을 자르든 다리를 잘라야 하는 상황이라니.

  상담을 하던 중 우리는 같이 울었다. 평소 보호자분 앞에서는 웬만해선 울지 않으려 하는데, 그날은 참을 수가 없었다. 주간에 일하던 수의사와 테크니션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한 조용한 병원 진료실에서 그렇게 보호자 분과 나는 잠시 같이 울었다.




  루팡이의 예쁜 발


  결국 보호자 분과 나는 상의 끝에, 발 끝을 먼저 절단해보기로 했다. 루팡이가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잘 적응해주기를 바라며 한 번의 기회를 더 갖기로 했다.

  발가락을 절단한 것은 발 끝 혈액순환 장애 발생 이후 46일이 되던 때였다. 수술을 마친 루팡이의 발끝은 아직 피부로 덮여있지 못했고, 이 부분이 피부로 덮일 때까지 지속적인 드레싱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행히 추가 이식술 없이 피부는 얇게 덮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루팡이의 발은 끝이 뭉툭하고 발등엔 이식피부인 옆구리 털이 듬성듬성 자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모양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 발은 이상해 보일 것이다. 발등 피부는 너무 얇고 이상하게 반들반들한데 듬성듬성 긴 털이 자라난 모습. 하지만 내 눈에는 이 뭉툭한 발이 보송보송 솜방망이 같고 동글동글한 다른 발들보다 더 귀여워 보였다. 2달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모두가 정말 최선을 다해 살려 낸 발.

  우리 루팡이, 정말 잘 견뎌줬어. 


  그 이후 루팡이는 테크니선 선생님들의 퇴원 축하 세리머니를 받으며 중성화 때문에 입원한 지 105일 만에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5일만 입원하려고 왔던 아이가 105일 만에 퇴원을 하게 되다니.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루팡이는 퇴원 후 초기에는 발 끝에 출혈이 몇 번 나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오르는 데 시도하다가 실패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 점차 적응하여 거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루팡이의 보호자분께서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주셨다.

  진심으로 대하면 결국 통한다는 것. 아끼는 척, 사랑하는 척, 진심이 아닌 위장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진짜로 얻지는 못한다는 것. 보호자분의 온화한 인품이 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였고, 나의 그 진심이 보호자분께 가닿았던 것 같다. 

  처음 루팡이에게 사고가 났을 때, 보호자분께서 심하게 따지고 컴플레인을 하셨다면 병원 차원에서 법이나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 병원에서 돈을 받아 다른 병원으로 가셔서 하루 만에 다리를 절단하고 평생 나를 원망하며 다시는 동물병원을 믿지 못하게 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루팡이의 보호자분께서는 나의 마음을 믿어주셨고, 심지어 루팡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다칠까 봐 걱정을 해주기도 하셨다. 나 또한 그 믿음과 온기를 자양분으로 루팡이에게 정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돈이나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마음.

  나는 우리가 진심을 나누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도 마음을 크게 다치지 않고 힘들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루팡이의 뭉툭한 발 끝에는 보호자분의 사랑과 우리 모두의 정성이 서려있다.

  이후 내가 병원을 옮기게 되면서 루팡이를 더는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루팡이는 꽤 자주 생각이 나고 진심으로 보고 싶다. 내 마음속 셋째 고양이 루팡이가 언제까지나 밝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먼 곳에서나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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