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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Oct 06. 2022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다

동물병원 인턴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2005년에 방영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시즌을 이어가고 있는,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사고와 주인공들의 러브스토리를 엮어 드라마틱하게 이끌어나가는 메디컬 드라마이다. 높은 인기로 17년이 넘게 방영되고 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즌은 뭐니 뭐니 해도 시즌1. 

  주인공이 갓 의사가 되어 인턴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의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조지가 응급 환자와 엘리베이터에 불의의 사고로 갇히는 바람에 덜덜 떨며 처음으로 환자 몸에 메스를 대는 에피소드나, 조금이라도 더 흥미 있는 환자를 맡으려고 욕심 내다가 관장이나 해 놓으라는 선임 의사의 명령에 입을 삐죽거리며 장갑을 끼는 모습들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동물병원의 인턴들의 모습을 겹쳐보곤 한다. 



  우리나라의 1년 차 수의사


  우리나라 수의사는 의사처럼 대학병원급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함께 하는 기관 (teaching hospital)에서 인턴이라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나오지 못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바로 사회에 던져지고, 개인이 차린 영리 목적의 동물병원에서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1년 차를 보내게 된다. 

  동물병원도 결국은 영리 목적의 사업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교육에 주점이 있기보다는 공부는 네가 알아서 하고, 병원 근무 시간에는 네 밥값을 하라는 분위기가 보통 주를 이루게 된다. 

  병원에 따라서는 인턴을 위한 교육 세미나나 스터디를 주선해주고 원외 세미나 참석을 적극 장려해주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근무 시간에는 아주 정신없이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물병원의 인턴은 아무래도 동물과 친해지고 보정에 익숙해지는 것을 제일 먼저 해야 하고, 그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6년간 배운 것은 대부분 책에 있는 지식이지, 실제로 개를 제대로 관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의과 대학에서는 임상 관련 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라서 임상 수의사로서의 삶을 선택한 수의사들은 6년 공부가 끝난 뒤, 다시 출발선상에 선 것이나 다름없다. 


  개를 키우지 않아, 실험견 외에는 개를 만져본 적도 별로 없는 인턴일 경우, 개를 오래 키워오신 보호자보다 개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할 수 있다. 질환의 발병기전이나 치료법에 대해 달달 외우기는 했어도, 보호자분께서 툭툭 던지시는 간단한 질문에도 바로 대답하거나 대처하기에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예전에 한 인턴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덜컥 보호자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보호자분이 하신 "암컷 강아지는 발정이 언제 처음 오나요?"라는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횡설수설하다가 진료실에서 울상으로 나온 적이 있다. 

  나와서 생각해보니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마치 대기업 임원면접이라도 하는 마냥, 엄청 떨다가 아는 것도 틀리는(?) 과오를 저지르고는 자기 허벅지를 엄청나게 꼬집었다는 후문이다. 



  인턴은 고달파


  개 한 마리 붙잡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귀 청소를 해야 하는데 이놈의 개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는구나. 이 녀석, 나의 미숙한 손길을 감지했는지 이때다 하고 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구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강아지를 이렇게 잡아야 하나 저렇게 잡아야 하나 끙끙대고 있는데, 앞에서 보정이 되길 기다리고 계신 보호자 분과 담당 수의사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나는 바보인가. 분명히 수업 시간에 다 배웠던 것 같은데 개가 목뼈가 몇 개였더라. 오늘 선배 수의사 선생님이 물어보시는데 바보처럼 대답도 못했다. 거울로 보진 못했지만 분명 멍청한 표정으로 어버버 거리고 있었겠지. 내 평생 내가 이렇게 바보 같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겁쟁이인가. 캬악대며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냥냥 펀치를 날리는 저 고양이에게 주사를 줘야 하는 시간이 너무나 무섭다. 얼마 전에 고양이에게 얻어맞아서 길게 스크래치가 난 팔뚝이 아직도 시큰거린다. 


  내 머릿속에는 지우개가 들어있는가. 어제 그 환자의 혈액 샘플을 검사기관에 보내달라고 부탁받았는데 다른 일을 하다가 완전히 까먹었다. 그 환자는 나 때문에 다시 피를 뽑으러 내원해야 한다. 이따 이 사실을 말하면 담당 수의사 선생님이 처음으로 욕하시는 걸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집에 왔다. 오늘 본 그 환자 질병명이 뭐였더라. 책이라도 한자 읽어둬야 하는데... 온몸이 쑤신다. 책상까지의 몇 걸음이 왜 이렇게 떼기가 어려울까.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온다. 


  이렇게 병원에서 근무시간엔 몸으로 하는 일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개인 시간에는 공부까지 하는 진정한 열정맨이 되어야 인턴 기간을 순탄히 보낼 수 있다. 



  힘을 내요 인턴쌤들!!


  아직 개와 고양이를 제대로 붙잡는 것조차 어색한 시기의 인턴은 경력이 높은 수의 테크니션 선생님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혼나기도 하고 개를 짐짝처럼 들고 있다가 혹시 개를 싫어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사나운 고양이를 보정하러 야심 차게 진료실에 들어갔다가 제대로 못 잡아서 누가 다칠까 봐 한껏 예민해진 담당 수의사에게 이렇게 할 거면 나가라는 말을 들으며 설움을 받기도 한다. 

  가벼운 진료인 줄 알고 진료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위중한 질환을 발견하게 되어 사색이 되기도 하며 보호자분의 질문에 아는 것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는 나와서 혼자 풀이 죽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모든 진료가 무겁게 다가온다. 간단한 진료에 들어가면서도 보호자분이 뭔가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실까 봐 잔뜩 긴장하게 되고, 내가 뭔가를 실수해서 환자가 잘못된 처치를 받을까 봐 무섭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고 자신감이 없으니 내가 결정한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나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지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간다. 개에게 몇 번 물려보면, 아, 이럴 땐 여기에 손을 대면 안되는구나. 배우게 되고, 

보호자분이 뭔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셔도 솔직히 제가 잘 모르니까 알아보고 알려드리겠다고 호기롭게 내지르는 법도 배우게 된다. 모르는 질환이나 처치들도 서서히 익숙해지게 되고, 차곡차곡 배워나가 언젠가는 손이 빠르고 결단력 있는 수의사로 거듭나게 된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 그레이가 시즌 1의 모습을 벗고 지금쯤에는 교수급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처럼. 


  동물병원에서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는 어린 수의사가 최선을 다해 진료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신다면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시길. 그는 지금 새내기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일 수 있으니. 


  지금 임상을 시작하려는 모든 신출내기 인턴 수의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환영한다고. 이 지독하게도 힘들지만, 참으로 재미난 임상의 세계에서, 꼭 그대만의 보람과 가치를 만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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